▲ 한지원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원

지난 칼럼에서 살펴본 불평등 이론은 소득의 양에 주목했다. 이론마다 강조하는 바는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경제학의 소득 개념을 공유하는 이론이었다. 경제학의 소득은 생산에 기여한 만큼 보상받는다는 개념이다. 불평등 이론은 기여와 보상의 공정성에 관련된 문제다.

반면 마르크스의 불평등 이론은 소득의 성격에 주목한다. 소득의 성격은 생산의 특성에서 나온다. 소득 사이 평등은 그 다음 문제다. 생산의 특성이 소득의 성격을 결정하고, 그 소득의 성격이 소득의 양에 영향을 미친다.

마르크스가 분석하는 소득의 성격은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 무언가를 가졌기 때문에 얻는 소득이다. 이윤 또는 기업소득이 대표적이다. 기업은 토지·건물·기계의 법적 소유자이다. 법적 인격을 가지는 기업은 오로지 소유하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다. 자산이 없는 기업은 법적으로 성립 불가능하다. 기업은 종사자들에게 생산수단을 임대하고 소득을 얻는다. 둘째, 무언가를 했기 때문에 얻는 소득이다. 임금이 바로 그것이다. 인류가 발전하는 이유가 인간이 무언가 생산적인 활동을 하기 때문이라면, 이 소득이야말로 인류 발전과 관계돼 증가하는 것일 터다.

자본주의적 생산과 분배 특징은 자산을 가진 사람이 생산물을 소유하고, 일을 한 사람은 보상만 받아야 한다는 점이다. 예로 현대자동차의 생산물인 자동차는 현대차 기업의 소유다. 자동차 판매수입도 현대차 소유다. 자동차를 만들기 위해 일한 사람은 기업에서 보상만 받는다. 생산물을 소유할 권리는 요구할 수 없다.

보상의 기준은 자의적이다. 절대적 원칙이 있는 것은 아니다. 임금은 노동의 대가로 불리지만, 기업은 노동을 구매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해 사람의 노동능력을 구매하는 것이다. 기업은 종사자에게 일을 시킨 후 노동시간이나 성과측정에 비례해 추가로 보상한다. 이때 보상의 주체는 기업이며 기업의 보상 기준은 자신의 소득, 즉 이윤이다.

그렇다면 이윤의 원천은 무엇일까? 극한의 상황 가정해 보자. 모두가 자산 소유자고 일하는 사람이 없는 세계와 반대로 모두가 일하는 사람이고 자산 소유자가 없는 세계가 있다고 치자. 전자는 작동 불가능하다. 후자는 효율성을 논외로 한다면 작동은 가능하다. 이런 극한 상황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일하는 사람의 기반 위에서 자산 소유자가 어떤 몫을 챙긴다는 것이다. 자산 소유자가 소유권을 통해 일하는 사람에게서 어떤 몫을 떼어 가고 있다. 마르크스는 이를 착취라고 불렀다. 자산 소유자가 몫을 챙기는 것은 순전히 사회의 소유권 제도 덕분이다. 근원적 원리는 없다. 그렇게 정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런 착취의 경제는 인류의 계급 지배 역사의 연장선에 있다. 노예제 사회에서는 주인이 노예를 소유하며 생존할 만큼만 농산물을 주고 나머지를 모두 차지했다. 봉건제 사회에서는 지주가 토지를 소유할 수 없는 농민에게 지대를 임의로 수취했다. 노예주와 지주는 다음 해 농사를 지을 수 있을 만큼의 자원만 남겨 두고 나머지(잉여생산물)를 독차지했다. 이런 경제를 계급경제라고 부른다.

근대 이후에도 이런 계급경제는 지속했다. 자유주의 혁명은 농민에게 자유를 줬지만, 자영농을 만든 것은 아니었다. 토지에서 쫓겨난 자유인은 스스로 새로운 고용주를 찾아 이동했다. 그리고 자신의 노동능력을 판매하는 임금노동자가 됐다. 임금노동자는 자유주의 확대로 시민 자격도 얻었지만, 생산수단 소유자에게 노동능력을 판매하고 보상을 받는 계급경제의 기본 구조는 그대로 유지됐다. 노예제의 폭력, 봉건제의 지대가 했던 기능을 시장의 평등(1원은 누구에게나 같다)과 자유(매매는 자신의 의사에 따라 이뤄진다)가 대신했다. 노동능력 재생산비를 포함한 보상(임금이라고 부른다)과 생산 복구에 필요한 비용(회계에서는 감가상각비나 고정자본소모로 부른다)을 제외한 생산의 나머지(잉여가치)를 기계·토지·화폐 소유자가 가져가는 자본주의가 이렇게 만들어졌다. 현대 자본주의의 지배계급은 자본가의 법적 화신인 기업과 그 법인기업의 주주들이다.

소득의 또 다른 형태인 부동산 소득은 자산 소유권의 상한치를 보여 준다. 기업의 소득은 생산과 연관이라도 돼 있지만, 부동산 소득은 생산과 무관하다. 사회가 만든 것도 아니고, 지구가 제공했을 뿐인 토지를 소유해 다른 사람에게 사용료(지대)를 뺏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부동산 소득은 임대료만이 아니라 매매차익도 큰 부분을 차지하는데, 부동산 가격의 형성은 소유권의 ‘끝판왕’이라 부를 수 있다. 부동산 가격은 현재와 미래의 임대료 청구권 가격이다. 토지 수요가 증가할 것이라 기대되고 지구가 멸망할 때까지 임대료를 걷을 수 있다고 가정하면, 이 청구권 가격에는 원리상 상한선이 없다. 이런 부동산 소득으로 부를 축적하는 것은 모든 자산가들의 이상이다. 착취라는 고생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모두가 부동산 소득으로 부를 축적하면 생산이 없기 때문에 공도동망한다. 영화 <기생충>에 빗대 말하자면, 이 사회의 진정한 기생충은 부동산 소득계층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마르크스의 분석은 소득의 양에 대한 분석 이전에, 소득의 성격에 대해 근본적으로 문제를 제기한다. 경제적 불평등 해소는 소득의 양에 대한 조정이 아니라 기업소득·토지소득 같은 착취에 기반한 소득을 없애는 것이다.

최근 문제가 많이 되는 임금소득 격차에 대해서도 짧게 덧붙여 본다. 임금노동자 내의 소득 격차는 두 가지 원인으로 발생한다. 첫째, 산업예비군(실업자·비정규직·영세 자영업자 등)의 증가다. 둘째, 노동시장의 규제 제도인 노동조합의 약화다. 산업예비군이 증가하면 일자리 경쟁이 격화하는데, 특히 경쟁에 취약한 부문에서 임금이 정체·하락한다. 또한 노동조합은 노동자를 단결시켜 경쟁을 완화하는데, 노동조합 조직률이 낮을 경우 임금격차가 커질 수밖에 없다. 기업은 노동자 간 격차를 키워 경쟁을 격화하고, 취약한 노동자를 더 착취해 이득을 늘린다.

마르크스의 경제적 불평등 해법은 계급경제를 재생산하는 소유법칙을 지양하면서, 동시에 고용과 임금을 연대하는 노동조합의 힘을 키우는 것이었다. 소득의 양에만 주목하는 방법은 소득의 성격으로 말미암아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었다.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원 (jwhan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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