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회적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주최로 18일 오전 서울 중구 포스트타워 18층 대회의실에서 열린 ‘2019년 가습기 살균제 피해가정 실태조사’ 기자회견에서 황전원 특별조사위 지원소위원장이 발언하고 있다. 정기훈 기자
“(피해자들이) 가습기 살균제 사건에서 해방됐으면 좋겠어요. 이걸로 상처를 많이 받았어요. 어떤 분은 (가습기 살균제 때문에) 아이 둘을 잃었는데 엄마만 멀쩡한 거예요. 엄마는 멀쩡한데 아이들이 그럴 수 없다는 식의 말을 듣고….”(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A씨 심층인터뷰 중)

가습기 살균제 참사가 세상 밖으로 드러난 지 10년이 흘렀지만 피해자의 아픔은 현재진행형이다. 협소한 피해질환 인정·피해등급 나누기·피해구제 지연으로 피해자들은 여전히 고통을 호소했다. 성인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465명 중 절반(49.4%)의 피해자는 자살을 생각해 본 적이 있다고 답했고, 실제 시도한 경험이 있는 이가 11%나 됐다. 아동·청소년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응답자 207명도 자살생각(15.9%)과 자살시도(4.4%)를 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사회적참사 특별조사위원회가 18일 오전 서울 증구 포스트타워 18층 대회의실에서 ‘2019년 가습기 살균제 피해가정 실태조사’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날 특별조사위는 가습기 살균제 피해를 입은 1천152가구와 성인(637명), 아동·청소년(236명) 피해자 873명을 조사한 결과를 발표했다. 전체 피해 가구와 피해자는 각각 4천953가구·6천590명이다. 한국역학회가 특별조사위 의뢰를 받아 지난해 10월부터 11월까지 조사했다.

특별조사위는 “가습기 살균제 노출 이후 드러난 정신건강 문제가 간과할 수 없는 수준”이라며 “피해자 범위 규정·피해자 입증책임 완화·배상 및 보상 규모와 절차 현실화를 위해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를 위한 특별법(가습기살균제피해구제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인도, 아동·청소년도 정신·건강 피해 겪어”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는 우울증·불안장애·불면증·자살위험 등 여러 정신과적 문제를 겪었다. 성인 피해자 465명은 우울·의욕저하(72%)와 불안·긴장(72%), 집중력·기억력 저하(71.2%), 불면(66%), 분노(64.5%), 죄책감·자책(62.6%), 소진·탈진(37.9%) 등에 시달렸다. 10명 중 8명(78.9%)은 만성적 울분을 호소했다. 아동·청소년 피해자도 집중력·기억력 저하(44.4%), 불안·긴장(42.52%), 분노(36.2%), 우울·의욕저하(34.3%) 등을 호소했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는 폐질환 이외에 다양한 신체질환·증상을 경험했다. 성인 피해자는 폐질환(83%), 비염 등 비질환(71%), 피부질환(56.6%), 안과질환(47.1%), 위염·궤양(46.7%), 심혈관계질환(42.2%)을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아동·청소년 피해자는 비질환(86.5%), 폐질환(84.1%), 피부질환(65.2%), 안과질환(49.8%), 주의력결핍행동장애(21.4%), 자폐증 등 발달장애(7.6%)를 겪었다.

김동현 한림대 의대 사회의학교실 교수(한국역학회장)는 “가습기 살균제에 노출된 사실과 노출 이후 질환이 발병 또는 악화한 경우 피해자로 추정하도록 가습기살균제피해구제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법사위, 가습기살균제피해구제법 개정안 처리해야”

이번 실태조사에서는 그간 노동·시민·사회단체 주장처럼 정부의 공식적인 피해 판정이 지연되면서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가 기업에 배상과 보상을 요청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한다는 사실이 실제로 확인됐다. 피해를 당한 1천152가구 중 기업에서 배상·보상을 받은 가구는 8.2%에 그쳤다. 86.8%는 배상과 보상을 요청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로 “정부가 아직 피해를 인정해 주지 않아서”(50%), “구제급여 대상이 아니라서 소송을 제기해도 패소할 것 같아서”(21%)를 꼽았다.

정부는 질환의 종류와 등급에 따라 구제급여와 구제계정을 나눠 지원금을 지급한다. 구제급여를 받은 경우 정부가 인정한 공식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가 돼 기업을 상대로 한 민사소송에서 승소할 가능성이 한층 높아진다. 구제계정은 가습기 살균제를 만든 기업들이 모은 자금과 정부 출연금 일부로 조성한 기금으로 정부 공식 피해자로 인정받지 못한다.

황전원 특별조사위 지원소위원장은 “지난해 12월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여야 의원의 특별한 이견이 없었음에도 차기 회의에서 반드시 의결하겠다며 가습기살균제피해구제법 개정안 의결을 보류해 피해자들이 크게 또 한 번 좌절감을 경험했다”며 “2월 임시국회가 개회한 만큼 법사위는 차기 회의에서 처리하겠다는 국민과의 약속을 지켜 달라”고 촉구했다. 지난해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를 통과해 법사위에 계류 중인 가습기살균제피해구제법 개정안은 피해자의 건강피해 범위를 포괄적으로 규정하고, 건강피해와 관련해 인과관계를 추정하는 요건을 완화해 권리구제를 확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