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류하경 변호사(법률사무소 휴먼)

지난 4일 서른여덟 살의 젊은 방송사 PD가 자살했다. CJB청주방송에서 14년 동안 일하면서 정규직 노동자의 외관과 실질을 갖췄음에도 사측은 형식상 프리랜서인 점을 들어 그를 이유 없이 해고했다. 그는 근로자지위확인 소송을 제기했으나 사측은 주요 증거를 숨겼고 동료 정규직들이 법정에 나와 사실과 다른 증언을 했다. 패소한 그는 회사와 동료에 대한 배신감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7일 언론노조가 성명을 발표했다. 제목은 “청주방송은 당장 잘못을 인정하고 고인의 명예회복에 나서라”다. 청주방송은 잘못이 있다. 그런데 언론노조는 잘못이 없는가. 필자는 언론노조의 위 성명이 ‘도저히 침묵할 수 없는 구차한 지경에 떠밀려서야 한마디 입을 연 행위’라고 느꼈다. 고인을 보며 느낀 슬픔과 변하지 않는 방송사 노동환경에 대한 답답함 때문에 생긴 감정적 반응이다. 언론노조의 성명에서 통렬한 반성을 찾아보기 어려워 실망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청주방송 프리랜서 문제는 2013년 산업재해보상과 관련해 노동자성을 인정한 행정법원 승소 사례에서 공개적·법적으로 드러났다. 2017년에도 지방노동위원회에서 노동자성을 인정받은 사건이 있었다. 이와 유사한 대전방송 프리랜서는 2016년 민사소송에서 노동자성을 인정받았으며 2018년에는 국정감사에서도 당사자 출석하에 방송사 프리랜서 문제가 다뤄졌다.

그런데 회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근로자성의 외관을 지우는 작업에 돌입했다. 이에 상처받은 한 프리랜서 아나운서는 퇴사했다. 언론노조는 방관자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MBC 2016·2017 사번 아나운서들 해고 사건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데, 언론노조는 위 사건에 대해 ‘1심 선고가 나올 때까지 입장보류’라는 입장을 갖고 있다. 사측 입장과 같다. 아나운서들이 지방노동위·중앙노동위원회·가처분 법원에서 내리 승소하면서 근거로 인정된 증거자료들은 언론노조가 파악하고 있거나 당사자들에게 쉽게 입수할 수 있다. 세 번의 법적 판단을 받았음에도 판단보류인 언론노조의 태도가 쉽사리 이해되지 않는다. 가처분 결정 이후 복직한 아나운서들에게 일거리를 주지 않고 사내전산망을 차단하는 등의 직장내 괴롭힘과 관련해서는 고용노동부 장관과 서울지방고용노동청장도 직장내 괴롭힘이 맞다고 했으나 언론노조의 비평은 전무했다.

언론노조는 청주방송 사건에 대한 성명에서 “단지 말뿐이 아니라면 고 이재학 PD의 근로자 지위를 인정하고 고 이재학 PD를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의견이 담긴 노무컨설팅 자료를 공개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 만시지탄, 체면치레, 이면수습이다.

노동조합은 공정방송과 언론자유 수호 외에도 노동자의 기본적 인권과 근로조건의 개선을 위해 사측과 날을 세워 투쟁해야 하는 헌법상 의무 또는 사회적 책무를 가진 조직이다. 사장과 정권만 ‘민주’의 얼굴로 교체한 것에 안주해 노조가 태평성대를 선언하고 비겁을 합리화하거나, 코드에 맞는 경영진 눈치를 보거나, 비정규직 비조합원 노동자의 보편적 아픔에 연대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 생기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청주방송 PD 사건 재판에서 사실과 다른 증언으로 PD를 공격하거나, PD에게 유리한 증언을 사실대로 진술한 동료들에게 진술을 번복하라고 하는 등 유무형의 압력을 행사한 개인들 중 언론노조 조합원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나약하고, 개인의 선심과 용기에 기대는 것은 위태롭다. 따라서 위 조합원들의 행위만 비판하고 말 일이 아니다. 위 조합원들은 평범한 사람들에 비해 특별히 악한 사람들이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언론노조는 책임이 있다. 비정규직 비조합원들이 사측에 십수 년 착취당하고 고통받는 것을 지근거리에서 목격했다면 이들이 절벽 끝까지 밀려서 법정으로 가기 전에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조합원들이 사측 편에서 증언하지 않고 진실을 말할 수 있도록 용기를 줘야 했다. 그런 환경을 조성해야 했다. 언론노조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청주방송을 공격하기에 앞서 스스로를 주먹으로 내리쳐야 한다.

방송사 노동문제가 자주 주목을 받는다. 노동운동·시민사회로부터 방송국은 ‘비정규직 백화점’이라는 오명을 얻었다. 그러나 방송사 계약직·간접고용·도급·파견·프리랜서 등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해결 과정은 너무 더디고 가시적인 성과가 잘 안 보인다. 가장 아픈 노동자의 신음은 정규직·언론노조의 울타리 밖에서 나오고 있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기에 청주방송 사건이 또 일어날 위험은 늘 있다. 폭탄 돌리기 같다. 다음에 또 방송사 비정규직 문제가 구체적 사례를 통해 공론화된 이후에 언론노조의 성명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때 나오는 노조의 ‘한마디’에서는, 이번 청주방송 사건에 대한 노조의 한마디와 마찬가지로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것 외에 특별한 의미를 찾기가 상당히 어려울 것이라고 미리 말해 두고 싶다. 이는 공정방송을 위해 함께 싸운 동지인 언론노조에 대해 너무 야박한 태도인가?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