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태진 금속노조 대전충북지부 노동안전보건부장(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쉽게 상하지 않게 하거나 맛나게 느끼도록 혹은 그렇게 보이도록 더하는 무수히 많은 식품첨가물, 건축물 내장재, 편리한 플라스틱 용기와 랩, 아이들 젖병·장난감·가전제품·컴퓨터·소파·침대 등에 들어 있다는 환경호르몬, 찌든 때·기름때·더러운 변기 등을 손쉽게 청소해 준다는 주방과 화장실·욕실용 세제들, 화장품·샴푸·악취제거를 위한 방향제들, 모기약과 해충 박멸제, 늘 입는 옷들, 그리고 이런저런 건강보조제와 의약품들, 의식주를 위한 거의 모든 것들 안에 화학물질이 들어 있다.

현재 상업적으로 유통되는 화학물질은 10만종이 넘는다. 매년 2천개가 넘는 새로운 화학물질이 개발되고 있다. 과학과 자본주의가 진화할수록 화학물질의 종류와 사용량은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국제암연구소에서 유해성 조사를 마친 화학물질은 1천여종이다. 그중에서 500여종이 발암물질 및 생식독성이 검증됐다. 발암물질 리스트에 오르지 않은 물질 중 인체에 무해하다고 검증된 것보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화학물질이 더 많다.

대책 없는 화학물질 관리체계

고용노동부는 2011년 ‘화학물질 및 물리적 인자의 노출기준’ 고시를 변경해 184종의 발암물질을 취급하는 사업장 작업환경측정과 노동자 특수건강진단을 하도록 했다. 그러다 2018년 고시에 187종으로 발암물질 3종이 추가됐으나 작업환경측정 대상 물질은 98종(52%), 특수건강진단 대상물질은 89종(98종 제외)에 불과하다. 유럽연합(EU)에서는 1천종을 관리하고 있고, 국제암연구소는 500종을 발암물질 및 고독성(CMR) 물질로 지정했다. 이에 미치지 못하는 기준인데도 관리가 되지 않고 노동자들이 무방비로 노출되고 있는 상황이다.

심지어 노동조합이 있는 사업장에서는 작업환경측정기관과 특수건강진단기관을 산업안전보건위원회에서 심의·의결해서 기관선정과 방식을 논의할 수 있지만, 노동조합이 없는 사업장은 사업주가 임의로 업체를 선정해서 조사하고 노동부에 보고한다.

산업안전보건법상 관리대상 물질에 대한 유해성 및 독성정보·대응요령 등을 노동자가 알 수 있도록 특별안전교육(16시간)을 해야 하지만 대부분 사업장에서 교육이 이뤄진 적이 없다. 따라서 노동자들은 유해성과 독성을 제대로 알지 못한 상태에서 화학물질을 사용하고 노출돼 있는 상황이다.

“사망자 1천527명, 피해자 6천734명.” 마치 어느 전쟁의 희생자수를 연상시키는 이 통계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있었던 가습기 살균제 사태 피해자들이다. 오랜 기간 국가는 사실상 책임과 의무를 방기했고, 기업은 발뺌하거나 심지어 보고서를 조작하면서 책임을 회피했다. 교수와 전문가들은 뒷돈을 받고 기업에 유리한 보고서를 써 줬다. 요컨대 가습기 살균제 사태가 우리 현대사에서 갖는 의미는 크다. 거의 모든 대형 사건사고가 그렇듯이 우리 사회의 부실하고 일그러진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 사건이었다.

무엇을 해야 하나?

가장 기본적으로는 알권리와 작업중지권(대피권)이 보장돼야 한다. 유해물질 사용에 대해서 누구나 알 수 있어야 한다. 유해물질을 직접 사용하고 직접적으로 노출되는 노동자부터 그 사업장 인근에 사는 간접적으로 노출되는 시민들이 알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사용하는 화학물질 공개와 더불어 노동자와 시민들이 손쉽게 독성정보를 알 수 있는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두 번째는 노동자가 안전하고 건강한 일터가 바로 지역주민의 안전·건강과 연결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기본적으로 유해물질을 위험하지 않은 물질로 대체해야 한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와 메틸알코올(메탄올) 사고처럼 자본이 이윤을 위한 비용절감 중심으로 화학물질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노동자와 주민·소비자 건강을 책임지도록 하는 사회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세 번째는 작업환경측정과 특수건강진단 대상 항목을 최소한 발암물질과 CMR 물질로 넓혀야 하며 노동자가 계획을 세울 때부터 실행 과정과 대책방안을 마련할 때까지 참여하고, 이후 문제가 발생할 경우 지역적으로 공론화할 수 있도록 지역 시민·사회가 관심을 갖고 역할을 해야 한다.

네 번째는 각 사업장이 화학물질 배출량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기업의 영업비밀보다 노동자와 지역 시민의 생명권이 우선해야 한다는 기본전제가 있어야 한다. 2009년 사용이 전면 금지된 석면은 악성중피종을 일으키는 물질로 보온재와 난연재로 널리 사용됐다. 지금은 없어진 부산지역 석면공장에서 일했던 노동자뿐만 아니라, 그 지역에 살았던 주민들에게서도 최근 악성중피종 피해자가 늘어 가고 있다. 이는 화학물질이 완전히 무해하다고 입증할 수도, 확신할 수도 없다는 것을 보여 주는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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