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채은 청년유니온 미디어팀장

노동 관련 뉴스를 보다 보면 쉽게 화가 난다. 어느 날은 채용비리 관련 기사를, 어느 날은 산업재해나 직장내 괴롭힘 등으로 죽음으로 내몰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접하며 이 세상이 합리적으로 작동하고 있는지 회의가 든다. 우리 사회에는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제도들이 존재하지만, 제도가 노동현장에까지 닿는 길은 멀기만 하다. 관련 법이 마련됐지만, 일터 괴롭힘은 여전하고 감정노동자 노동환경에도 아직은 큰 변화가 없다. 최저임금 운동을 하면서 업종별로, 규모별로 최저임금을 차등적용하자는 주장을 들었을 때에는 우리 사회가 과연 열악한 일자리에서 노동하는 이들을 보호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지, 저들은 우리와 이 사회를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 맞는지 회의감에 빠지고 만다.

우리 사회가 청년을 바라보는 시선에도 냉소가 섞여 있다. 청년은 끈기가 없다거나 노력을 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청년들이 ‘노오력’이라는 단어로 이러한 시선을 풍자한 지 오래지만, 얼마 전 어떤 정치인은 “꿈이 없다고 해서 멍하게 살면 안 된다. 꿈은 자꾸 꿀 줄 알아야 한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청년을 바라보는 틀리고 낡은 시선을 여과 없이 드러낸 것이다. 정치인이, 언론이, 사회가 청년을 호명하는 방식은 늘 이런 식이다. 자신의 이해와 의도에 맞춰 청년이라는 모호한 집단이 마치 특정한 성질을 동일하게 공유하는 것처럼 만든다. 원할 때는 찬란한 미래세대가 됐다가 돌아서면 무기력한 세대가 된다.

청년이 사회에, 사회가 청년에게 향하는 냉소는 악순환의 고리가 돼 다음을 이야기할 수 없게 한다. 청년에게는 앞으로를 살아갈 다음이 있기에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다음 이야기를 하기 위한 물꼬를 터야 한다. 청년과 사회가 서로를 향한 냉소를 거두기 위한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청년은 사회에 대한 회의감을 느끼기보다 앞으로를 살아갈 미래에 대한 기분 좋은 상상을 해야 한다. 사회는 청년을 조언이나 도움이 필요한 시혜적인 존재로서가 아닌 이 사회를 살아갈 주체로서 청년을 대해야 한다. 동등한 위치에서 그에 맞는 대우를 하고 역할을 나눠야 한다. 청년이 좀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사회가 조금이라도 나아지기 위해서는 세상에 만연한 냉소를 넘어 다음을 그릴 수 있어야 한다.

다음을 그리기 위해 청년유니온이 존재한다. 청년유니온은 사회가 청년에게 부여한 ‘불쌍한 청년’ 프레임을 깨고 ‘문제를 제기하는 청년’ ‘변화를 요구하는 청년’ 그리고 ‘변화를 직접 만들어 내는 청년’이었다. 청년유니온은 우리 사회 가장 모서리에 있는 청년의 노동 문제를 발굴하고 제기하며 변화를 만들어 왔다. 이러한 변화는 때로는 분노로, 때로는 연대로 가능했다. 이렇게 만든 변화는 냉소를 넘어 다음을 그릴 수 있는 단초가 됐다.

창립 10주년을 앞두고 청년유니온의 다음을, 우리 사회의 다음을 고민한다. 우리가 이제까지 외쳐 온 다음 사회는 노동이 ‘정말로’ 존중받는 사회다. 말로만 ‘노동존중 사회’를 내건다고 존중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음의 일터는 어리다고 반말을 듣지 않는 일터, 마음도 신체도 안전한 일터여야 한다. 다음 사회는 고용관계와 상관없이, 일의 형태와 상관없이 일하는 사람 누구나 사회의 보험을 받을 수 있는 사회여야 한다. 이런 삶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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