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지원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원

조국 사태 후과로 4·15 총선에서도 빈익빈 부익부, 즉 세습되며 확대되는 경제적 불평등이 중요한 쟁점이 될 것 같다. 총선을 준비하는 정당들은 “개천에서 용이 된” 케이스의 청년들을 앞장세워 이 쟁점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끌려 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모두 알다시피 이런 공천 세일즈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정당들의 경제 강령이나 정책에는 불평등 원인도 해결책도 딱히 보이지 않는다. 경제적 불평등을 설명하는 이론들을 몇 가지 살펴보면서 한국 사회 빈익빈 부익부의 원인과 해결책을 찾아보자.

가장 전통적인 이론은 경제가 성장하면 불평등이 완화된다는 이론이다. 쿠즈네츠의 역U자(∩) 모델로 불린다. 경제성장 초기에는 성장동력을 소유한 소수의 행위자가 소득을 독점해 불평등이 증가하지만, 성장이 계속되면 기술·자본·숙련·교육 등이 일반화되면서 성장혜택을 다수 행위자가 누릴 수 있게 된다. “밀물이 들어오면 모든 배가 떠오른다”는 말처럼 경제성장이 결국에는 모두를 풍요롭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세계적으로 1960년대까지는 실제로 맞는 것처럼 보였다. 한국에서도 1990년대 중반까지 이런 상황이 꼭 들어맞았다. 하지만 역U자 모델은 미국에서 1990년대 이후 경제성장과 불평등이 함께 높아지는 현상이 일반화하면서 설명력을 잃었다. 한국에서도 외환위기 이후 상황이 그러했다.

2015년 세계적인 불평등 논쟁을 일으킨 토마 피케티는 역U자를 뒤집어 U자 모델을 주장했다. 불평등은 예외적인 시기(U자의 바닥)에만 낮아졌다가 다시 증가한다는 주장이다. 자산수익률은 역사적으로 일정했고, 자산 크기는 역시 일정하게 증가하는 경향이 있는데, 만약 이런 조건에서 경제성장률이 낮아지면 전체 소득 중 자산소득 비중이 상대적으로 더 커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근거다. 즉 자산가의 부는 증가하고, 노동자의 소득은 감소한다. 실증적으로 경제성장률이 자산수익률보다 높았던 시기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짧은 기간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1960~90년대 중반 고도성장 때가 그 예외적 시기였다.

하지만 U자 모델은 근거가 자의적이란 결함이 있다. 피케티가 말하는 자산수익은 대부분이 부동산 지대로 이뤄져 있는데, 그는 “부동산 불패신화”를 암묵적으로 전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동산은 제조품과 달리 기술혁신이나 생산비가 아니라 주변 규제나 시장 기대가 가격을 결정한다. 만약 부동산 소유를 제한한다거나, 과세를 강화할 경우 U자 모델은 얼마든지 불평등이 낮아진 후 유지되는 L자 모델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기술발전에 따른 불평등 숙명론도 여럿 제기된다. 노벨상을 예약해 놨다고 평가받는 대런 애스모글루는 숙련 편향적 기술 확대가 임금 격차를 양극화한다고 분석한다. 빠르게 발전한 자동화 기술은 적당한 임금을 받던 중숙련 일자리를 크게 줄였고, 반대로 첨단산업 고숙련 일자리는 늘렸다. 그 결과 노동시장은 자동화가 불가능한 고숙련·고임금 일자리와 아예 자동화도 불필요한 저임금·저숙련 일자리로 양극화했다. <제2의 기계시대>란 책으로 인공지능 디지털 경제 열풍을 일으킨 에릭 브린욜프슨은 한발 더 나아가 “슈퍼스타 경제”가 필연적으로 도래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디지털로 무한복제가 가능하고, 또한 네트워크로 다수가 묶이는 경제에서는 최고의 능력을 갖춘 소수가 서비스를 쉽게 독점할 수 있고, 소비자도 굳이 2등, 3등의 서비스를 바라지 않아서다. 미국이나 우리나라에서 학력별 임금격차가 커지고 특히 슈퍼스타 부자들이 첨단산업에서 많이 나오는 현상은 이들의 묘사와 흡사해 보인다.

그런데 기술 숙명론들은 기술이 이런 식으로 계속 발전할 수 있다고 전제한다는 점에서 결정적으로 오류가 있다. 자본주의적 기술발전은 이윤이 증가해야 지속성이 있는데, 대량실업이나 다수 빈곤층을 만드는 방식으로는 이윤이 증가할 수가 없다. 소수를 위한 사치재를 생산할 것이 아니라면, 대량소비 가능한 상품들이 만들어지고, 대량소비가 가능한 대중 소득도 분배돼야 기술도 발전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만약 저들의 주장처럼 기술이 발전한다면 기술발전은 곧 중단될 수밖에 없다. 결국에는 돈이 안 되는 기술이 돼 버리는 탓이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첨단산업 발전에도 불황의 어둠이 가시지 않는 이유도 이와 관련이 있다.

우리나라의 불평등을 한국적 노동시장 특성으로 설명하는 이론들도 있다. 외환위기 이후 노동시장 유연화가 폭력적이고 그야말로 무분별하게 확대된 가운데 대기업·공공부문 기업별노조가 이를 나름대로 막아 내다 보니 노동시장이 지진이 난 후의 땅처럼 갈라졌다는 것이다. 대기업·공공부문 정규직 일자리는 세계 최고 수준의 임금과 복지를, 나머지는 신자유주의의 최악을 보여주는 저임금 불안정 상태가 돼 버렸다.

그런데 이런 노동시장 중심의 불평등 접근법은 자본 간 격차를 과소평가한다는 단점이 있다. 한국은 1970년대 중화학공업화를 추진한 이후 제조업에서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자본축적 격차가 지속적으로 벌어졌다. 또한 정부의 대기업 규제가 내수시장에서 대기업 고용을 늘리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영세 기업들이 나름의 생산성을 높이도록 만든 것도 아니었다. 사실 우리나라 임금격차의 상당 부분은 착취의 차이보단 자본능력 격차로 인한 생산성 차이로 설명된다.

<균열일터>란 책으로 유명한 데이비드 와일은 노동시장 분절화가 21세기 기업형태 변화에서 기인한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코어사업과 주변 사업을 분리할 수 있는 네트워크 기술과 경영전략 발전으로 이제는 경비원부터 최고경영자까지 한 회사에 고용될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분석 역시 절반의 진실만 보여줄 뿐이다. 기업들이 수직계열화 융합일터에서 코어사업만 남기는 균열일터로 변한 것은 기업들이 이윤율 하락에 반응하는 하나의 방식일 뿐이기 때문이다. 즉 기술이나 경영전략 변화 이전에 이런 기업형태의 변화가 자본축적의 위기를 증명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경영관행의 변화나 몇 가지 노동보호 제도로 이런 경향을 역전시킬 수는 없다.

불평등에 관한 자본측 분석과 노동측 분석을 종합한 것은 마르크스였다. 마르크스는 이상의 이론들이 가진 결함을 훌륭하게 보완하며, 새로운 측면에서 불평등을 분석하며 해결책을 제시한다.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원 (jwhan77@gmail.com)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