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윤경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민변 민생경제위원회·참여연대 주최로 29일 오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하도급법 개정 및 제도개선을 위한 토론회. 정기훈 기자
중소기업 대표인 A씨는 대기업과 하도급계약을 맺고 일하면서도 그 흔한 계약서를 작성하지 못했다. 원사업자는 구두로 “언제까지 작업을 끝내라”고 지시했다. 하도급대금은 원사업자의 예산 사정에 따라 임의로 지정됐다. 나중에 확인한 계약서에는 실제 작업과 무관한 작업내용이 하도급대금에 맞춰 기입돼 있었다.

A씨는 자신이 받은 하도급대금이 어떤 업무에 근거해 책정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갑 중의 갑인 원사업자에게 근거를 따질 수도 없었다. 다음 계약을 맺을 수 없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도급업체는 작업 중 계약을 해지할 권한이 없다.

원사업자 예산에 맞춰 지급된 하도급대금은 턱없이 부족했다. A씨는 소속 노동자들의 임금은 물론 공과금조차 제대로 내지 못했다. A씨는 결국 폐업을 선택했다. 하도급계약 서면미교부와 하도급대금 부당결정 등의 피해를 호소하며 민사소송을 제기했지만 증거를 확보하지 못해 패소했다.

A씨는 신용불량자가 돼 거리로 내몰렸다. 공정한 하도급거래 질서를 확립하고 수급사업자의 권리를 보호해야 할 하도급거래 공정화에 관한 법률(하도급법)이 우리 사회 수많은 A씨를 보호하지 못하고 있다. 하도급법 적용범위 확대와 전속적 하도급거래 강요 금지, 불공정 하도급거래 피해구제 강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계약서 작업내용 다르고 대금 산출근거도 없어”

29일 오전 국회 의원회관에서 ‘하도급법 개정 및 제도개선을 위한 국회 토론회’에 참석한 조선업·제조업·자동차 정비업 하도급업체 대표들은 하도급 불공정거래 피해를 주장하며 “내가 바로 A씨”라고 입을 모았다.

업종은 다르지만 이들이 겪은 불공정거래 내용은 A씨와 비슷했다. 실제 작업과 다른 계약서는 기본이고 산출근거도 없는 하도급대금이 지급됐다. 한익길 전국조선해양플랜트하도급대책위원회 위원장은 “대형 조선사는 협력사에 특정구역에 관한 설계도면만 줄 뿐 실질적인 작업에 부합하는 계약서는 써 주지 않는다”며 “사후 법적 대응을 준비하며 확인한 계약서에는 작업내용과 전혀 다른 내용이 명시돼 있었다”고 말했다. 이날 토론회는 제윤경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민변 민생경제위원회·참여연대가 함께 주최했다.

조선업과 제조업을 필두로 한 하도급 불공정거래는 이미 만연한 문제다. 피해업체들은 원사업자에 대한 공정거래위원회의 과징금 부과에도 피해구제를 받지 못한다. 민사소송을 제기해도 증거 부족으로 줄줄이 패소하는 게 현실이다. 김남주 변호사(참여연대 민생희망본부 실행위원)는 하도급법 개정의 시급함을 강조했다. 김 변호사는 “원사업자 업종에 따라 하도급법 적용에서 빠지는 경우가 많아서 사각지대가 발생하는 데다, 많은 원사업자가 하도급대금 산정방법과 산정을 위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고 있다”며 “일부 원사업자는 전자문서로 하도급 관련 정보를 제공하고, 사외에서 다운로드·출력·파일 실행이 되지 않도록 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하도급업체가 하도급법 위반 신고나 소송을 하려고 해도 원사업자의 이 같은 행위로 인해 증거 확보가 곤란하다”고 전했다. 김 변호사는 “하도급업체에 교부하는 서면에 표준품셈·단가·각종 지수와 하도급대금 산정기준을 담아야 한다”며 “현행법상 문서 ‘발급’ 용어를 ‘교부’로 변경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하도급 불공정행위 조사 전담기관 필요”

공정거래위가 하도급법 위반으로 원사업자에게 과징금 처분을 내리더라도 실제 피해구제로 이어지는 사례는 극히 드물다. 하도급법 위반 행위에 대해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가 도입됐으나 손해 입증의 어려움과 법원의 소극적 적용으로 제도는 사실상 무용지물이 됐다. 김남주 변호사는 “통상 하도급대금과 손해배상액을 추정하는 규정을 하도급법에 신설하는 한편 징벌적 손해배상액 상향을 통해 피해기업 구제를 강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욱조 중소기업중앙회 혁신성장본부장은 “하도급대금 결정과 감액, 기술자료 요구는 중소기업 입장에서 볼 때 치명적인 불공정거래행위임에도 하도급법상 ‘정당한 사유’로 인정돼 근절되지 못했다”며 “정당한 사유에 대한 입증책임을 원사업자에게 두는 내용의 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제윤경 의원은 2016년 하도급법 개정안을 발의하며 공정한 하도급거래 질서 확립과 감독을 위해 공정거래위와 지자체에 하도급감독관을 두는 내용을 포함했다. 서보건 변호사(법률사무소 다름·민변 민생경제위)는 “근로감독관 제도는 1천100여명에 달하는 인력충원과 그들의 거점이 된 각 지방고용노동청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며 “인력과 조직이 뒷받침되기 어려운 상황에서 하도급감독관을 신설하기보다는 지자체에 분쟁조정 업무를 위임하거나 하도급·가맹사업·대리점 분야 불공정행위에 대한 조사 권한을 갖는, 고용노동청과 유사한 기관을 지방단위에 신설하는 방안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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