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노사관계컨설턴트

30개가 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에서 지난 10년 동안 노조 조직률이 꾸준히 늘어난 나라는 아이슬란드·터키·한국뿐이다. 이들 3개국에서는 조합원이 조금씩이라도 늘어난 반면 다른 대다수 나라에서는 조금씩 줄었다. 이명박-박근혜 정권하에서도 노조 조직률, 특히 조합원이 더디지만 지속적으로 늘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노동운동의 양적 성장과 축적이 촛불항쟁의 원동력이 됐고, 결국 보수적 자유주의 정권인 문재인 정부의 출현으로 이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2019년 9월10일 민주노총이 자체 발표한 신규 조합원 현황 자료에 따르면 민주노총 산하 노조에 속한 조합원은 2019년 4월 현재 101만4천845명으로 김명환 집행부가 출범한 2017년 1월보다 27만7천971명(27.4%) 늘었다. 같은해 12월25일 정부 발표에 따르면 2018년 기준 민주노총 산하 노조 조합원은 97만명으로 민주노총은 1995년 11월 창립 이후 23년 만에 1노총으로 올라섰다.

반노동 정권인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도 서서히 늘어나던 민주노총 조합원은 문재인 정권 들어 급증했다. 현실을 돌아볼 때 문재인 정권이 이전 정권들과 비교해 눈에 띄는 친노동(pro-labour) 정책을 펼친 것은 아니다. 이명박-박근혜 정권과 문재인 정권의 차이점이라면 정부가 불법을 저지르느냐, 아니면 있는 법이라도 그럭저럭 지키느냐가 아닐까 싶다. 앞선 정권들이 ‘불법-초법-탈법’을 가로지르며 반노동 정책을 펼쳤다면, 현 정권은 국제사회가 공인한 국제노동기준에도 모자라는 현행법을 수동적으로 지키는 수준의 정책을 펼쳤다. 한편으론 노동권 개선과 일하는 환경 개선에서 정치적 결단으로 해결할 문제를 입법 절차나 사법 결정에 미뤄 왔다는 아쉬움이 크다. 정권이 만들고 행하는 정책의 불법성과 합법성의 차이를 두고 현 정권이 ‘진보적’이지 않느냐 운운하는 것은 과학적이지 못하지만, 최소한 정부의 ‘중립적’ 태도가 조합원 증가를 가져온 여러 요인 중 하나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지난 10년 동안, 길게는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이후인 지난 20년 동안 한국 노동운동이 느리지만 꾸준히 성장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같은 기간 민주노총 운동이 꾸준히 성장해 1노총이 된 배경은 무엇일까. 필자는 가장 큰 이유로 산업별노조를 꼽고 싶다.

1998년 2월 보건의료노조 출범을 계기로 본격화한 산업별 노조운동(industrial unionism)은 이제 민주노총 산하 노조 조합원의 87%가 산업별노조에 속해 있는 수준으로 성장했다. 민주노총 산하 노조 조합원 10명 중 9명이 산업별 노조원인 셈이다. ‘무늬만 산별’이라는 비판이 있고, 노사관계와 단체교섭에서 산업별 수준에 걸맞은 실천을 이뤄 내지 못하는 한계가 있지만, 민주노총 운동에서 산업별 노조운동이 대세로 자리 잡았음을 부정할 수 없다.

노동자가 노조에 가입하는 체제가 산업별노조라면, 기업별노조는 노동자가 노조를 만들어야 하는 체제다. 노동자가 알아서 노조를 만들어야 하는 노동운동은 초보적 수준의 노동운동이 아닐 수 없다. 산업별노조 건설이라는 노동운동의 역사적 과제와 관련해 민주노총 운동은 노동자가 노조를 만들어야 하는 초보적 단계를 지나, 이제 노동자가 노조에 가입하는 단계로 진입한 것이다.

산업별노조는 노조가 이미 존재하므로 노동자를 가입시키면 되지만, 기업별노조는 노조가 아직 존재하지 않으므로 노동자가 노조를 만들어야 한다. 조직화 측면에서 산업별노조는 인력과 자원과 경험이 있는 노조가 주체가 되지만, 기업별노조는 인력과 자원과 경험이 부족한 노동자가 주체가 될 수밖에 없다. 그 존재 양식에서 산업별노조는 정상적인 노조라면 끊임없이 사업장을 가로지르며 조직화를 추진하게 되지만, 기업별노조는 특정 사업장의 노동자가 노조를 만들려 나서지 않는 이상 조직화가 어려운 시스템이다. 조직화에 필요한 효과성과 효율성을 고려할 때 기업별노조는 산업별노조에 비해 경쟁력이 떨어지고 비용이 더 들어갈 수밖에 없다.

IMF 관리체제 이후 민주노총 운동은 꾸준히 산업별 노조운동을 펼친 반면 안타깝게도 한국노총 운동에서는 산업별 노조운동이 큰 진척이 없었다. 이번 한국노총 임원선거에서도 산업별노조 활성화는 별다른 이슈가 되지 못하는 듯하다. 산업별노조만이 유일한 이유는 아니겠지만, 이러한 조직 노선의 차이가 1노총 지위를 역전시키는 결과로 이어진 게 아닐까 싶다.

물론 1노총이 됐다는 것과 민주노총 자체의 힘이 커진다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민주노총 조합원이 늘어난 게 아니라 민주노총 산하 산업별노조들의 조합원이 늘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민주노총의 회원은 사람이 아니라 조직(affiliates)이라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사실 조직 노선과 관련해 민주노총 조합원이라는 말 자체가 비과학적이다. 민주노총 운동의 경우 민주노총의 힘이 커진 게 아니라 그 산하 산업별노조들의 힘이 커진 것이고, 이는 (지난 20년 동안 민주노총이 겪어 왔듯이) 가맹조직들로서는 민주노총으로의 구심력이 아니라 민주노총으로부터의 원심력을 키우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반대로 한국노총 운동에서는 기업별노조에 기반한 산업별연맹들이 갖는 한국노총으로의 구심력(의존성)이 상대적으로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물론 노총으로부터의 원심력과 노총으로의 구심력은 현실 상태를 반영하는 것으로 우열의 위치를 갖는 것은 아니다. 주체와 환경의 변화에 따라 늘 변할 수밖에 없는 유동적인 개념이다. 민주노총 운동은 더욱 커진 산업별노조들의 힘과 위상을 의사결정 구조에 충실히 반영하는 방향으로 조직 체계를 개혁해야 할 것이고, 한국노총 운동은 기업별 노조운동을 뛰어넘어 산업별 노조운동으로 나아가는 방향으로 조직 노선을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민주노총이 1노총이 된 달라진 노동운동 지형은 이러한 운동 과제를 양대 노총에 제기하는 것으로 보인다.

아시아노사관계컨설턴트 (webmaster@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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