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은행경비원 C씨와 D씨가 작성한 합의각서와 서약서. 정의당 비상구
과거 청원경찰이 하던 은행 경비업무가 이제는 용역업체 소속 간접고용 비정규 노동자로 대체됐다. 우리가 청원경찰로 알던 은행경비원들은 저임금과 고용불안, 경비업무 외 이어지는 수많은 업무지시와 갑질에 시달리고 있다. 동전 세기나 현금지급기 수리는 물론이고 전표작성·금융상품 홍보·택배 포장과 운반 업무도 어느새 이들의 업무가 됐다. 은행마다 적게는 3~4개 많게는 10개의 용역업체를 두고 있는 데다, 지점당 많아야 2명, 대개 1명이 일하고 있어 공동의 목소리를 내기가 쉽지 않다. 같은 은행에서 일해도 지점에 따라 용역업체가 다르다. 은행경비원들은 “만연한 경비업무 외 업무지시와 쉬운 해고·임금 체불·연차 미부여 등 기초고용질서가 무너진 현장이 은행경비업계”라며 고용노동부에 은행경비원 노동환경 실태조사와 불법파견 여부에 대한 근로감독을 촉구했다.

은행직원 자녀 연필 50자루 깎은 은행경비원

19일 정의당 비정규 노동상담 창구 비상구와 은행경비연대에 따르면 은행경비원들은 자신의 고유업무 외의 업무지시와 직장 갑질에 시달리고 있다.

용역업체 소속으로 시중은행에서 경비업무를 하는 A씨는 최근 은행직원으로부터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을 통한 대출업무를 고객에게 안내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A씨는 경비원이 대출 관련 업무를 하는 게 맞는지 의문이 들었지만 지시를 거부할 수는 없었다. A씨가 받은 지시는 그나마 은행 관련 업무였다.

B씨는 은행직원 자녀의 연필을 깎아야 했다. 은행직원이 자녀 학용품 준비로 연필을 깎으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일회성에 그치긴 했지만 B씨는 “어처구니가 없어 제대로 말할 겨를도 없이 연필 50자루를 깎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지점장 지시로 은행직원들과 아파트 분양관 대출업무에 동행해 모바일 계좌를 개설하고, 카드발급을 했다. 분양관 업무 과정에서 불만 고객을 상대하고 심부름을 했다. 그럼에도 B씨는 시간외수당을 받지 못했다. 일주일에 두 차례 이상 다른 은행 고객 대출 상환업무까지 했다.

A씨와 B씨 사례는 특정 지점의 돌출행동일까. 이태훈 은행경비연대 위원장은 “그렇지 않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대출업무는 통상 업무지시로 보기 어렵다”면서도 “은행이나 지점에 따라 차이가 있을 뿐 은행직원들의 직접지시로 고객에게 공인인증서를 깔아 주거나 직원의 시재(현금) 마감, 현금지급기 수리, 동전·현금 세기, 택배 포장·운반 등 경비업무 외 업무지시를 받는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정의당 비상구가 은행경비원 대출업무 수행과 관련해 은행연합회 법무팀에 문의한 결과 “문제가 있다”는 답변을 받았다. 대출심사 업무는 은행직원의 고유업무다. 결재까지 이뤄졌다면 은행법과 개인정보 보호법 위반 소지가 있다.

은행경비연대에 따르면 강원지역 한 은행에서는 은행경비원이 마을 이장 요청으로 김장사역과 야유회에 동원됐다. 어느 지역에서는 휴가를 간 하나로마트 노동자를 대신해 계산업무를 수행한 은행경비원도 있다. 이태훈 위원장은 “지방으로 갈수록 말도 안 되는 갑질이 많다”며 “지시를 거부하면 업무적으로는 물론 지역 특성상 관계 문제로 피해를 입게 되기에 보통은 거절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출근 첫날 해고되는 ‘파리 목숨’

은행 경비업무는 1997년 외환위기 이전까지만 해도 청원경찰이 담당했다. 외환위기 이후 청원경찰이 있던 자리에 용역업체가 들어오면서 간접고용 비정규 노동자로 채워졌다. 이들은 6개월에서 1년 단위로 근로계약을 체결한다. 심한 곳은 3개월마다 고용을 연장한다. 퇴직금 지급과 무기계약직 전환을 피하기 위한 꼼수다.

대개 지점당 1명씩 일하는 탓에 연차 사용은 고사하고 예비군 훈련도 가기 어렵다. 이 위원장은 “대체인력이 없어 경비원이 직접 임시직을 구해 두고 연차휴가를 가는 곳도 있다”고 귀띔했다.

은행경비원에게 쉬운 해고는 일상이다. 은행경비원 C씨는 2017년 출근 첫날 해고됐다. 고객 응대가 미흡했다는 이유였다. 항의를 했지만 사측은 문제제기를 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합의각서에 서명하라고 요구했다. 각서에는 “본인의 퇴직함에 있어 해고예고수당(1개월급여분)을 지급하고 실업급여 수령대상자로 처리할 것”이라며 “향후 일체 문제제기(노동부 진정·산업은행 민원·금융감독원 민원·청와대 국민신고·보복성 연락 등) 진정 및 어떠한 방법으로도 피해를 입히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이 담겼다.

D씨는 지난해 근로계약서와 함께 서약서에 서명했다. 서약서에는 “은행(원청)이 용역업체(하청)에 은행경비원 교체요청이 있을 경우 해고돼도 이의가 없고 어떤 불이익도 감수하겠다”는 내용이 기재돼 있었다.

최강연 공인노무사(비상구)는 “은행경비원은 파리 목숨”이라며 “노동자 생존권을 보장하기 위해 근로기준법은 정당한 이유 없는 해고를 금지하고 있지만 원청인 은행의 말 한마디에 은행경비원들은 하루아침에 해고되고 부당한 업무지시와 갑질에 시달린다”고 비판했다.

경비업무 외 업무지시, 불법파견 논란 일까

경비업법 7조(경비업자의 의무)에 의하면 경비업자는 허가받은 경비업무 외 업무에 경비원을 종사하게 해서는 안 된다. 이를 위반하면 경비업 허가가 취소된다. 그러나 <매일노동뉴스>가 직접 만나고, 은행경비연대와 비상구에서 받은 은행경비원 복수 제보에 따르면 이들은 경비업무 외에도 은행 관련 업무는 물론이고 은행직원 개인업무에 동원되기 일쑤였다.

은행경비원들은 경비업법 위반과 불법파견 의혹을 제기한다. 노동부는 은행경비원이 경비업법을 적용받기 때문에 불법파견보다는 경비업법 위반 여부를 먼저 봐야 한다는 입장이다. 노동부 관계자는 “외적으로 볼 때 은행직원이 경비업무 외 업무를 지시했기 때문에 불법파견 여부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법적 측면에서 볼 때 우선순위는 경비업법 위반 여부”라며 “경비업법을 선행적으로 판단해 처벌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남근 변호사(민변 부회장)는 “경비업무 외 업무 지시와 관련해 경비업체에 대한 허가 취소나 행정적 제재를 하는 것이 우선”이라며 “은행경비원이 경비업무를 하면서 추가로 한 일이기에 파견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파견법)보다는 경비업법을 우선 적용하고 추가업무에 대해서는 보수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은행직원이 용역업체 소속 은행경비원에게 경비업무 외 업무를 지시한 것이기에 불법파견 여부를 따져 봐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최강연 노무사는 “용역업체 소속 노동자들이 사실상 도급인 회사의 구체적인 지휘·감독을 받으며 업무를 수행하면 그 관계는 실질적으로 파견관계가 된다”며 “파견을 도급으로 위장한 위장도급 즉 불법파견이 성립하고 도급인 사업주에게 직접고용의무가 발생한다”고 말했다. 이태훈 위원장은 “노동부는 은행 용역업체 실태조사와 근로감독을 통해 기초고용질서를 바로잡고 불법파견 여부를 조사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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