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훈 기자

처음과 끝이 다르지 않았다. 지난 3년이 어땠는지 물었을 때 김주영(58·사진) 한국노총 위원장은 “부족한 점은 있었지만 최선을 다했다”며 “적어도 조합원을 팔거나 뒤통수치는 일은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2017년 2월1일 <매일노동뉴스>와 취임 인터뷰를 하면서 어떤 위원장이 되고 싶냐는 질문에 “조합원에게 신뢰받는 위원장”이라고 답했다. 초심을 유지하는지 돌아보고 또 돌아보면서, 임기가 끝났을 때 조합원들에게 ‘아 김주영이 우리 뒤통수는 안 쳤구나’ 이런 평가를 받고 싶다고 했다. 세 번의 도전 끝에 한국노총 위원장이 됐던 그가 3년이라는 시간 동안 하루하루를 어떤 마음으로 살았을지 짐작케 하는 말이다.

지난 16일 오전 서울 여의도 한국노총회관 7층 위원장실에서 만난 김 위원장은 “우리 사회가 건강하게 발전하려면 누군가는 사회적 균형을 잡아 줘야 한다”며 “그게 바로 노사정의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스스로를 ‘사회적 대화 신봉자’라고 말하는 그는 “기후변화나 AI(인공지능) 같은 4차 산업혁명 부산물들이 가시화되면서 먹고사는 문제가 점점 어려워질 것”이라며 “고용 없는 성장과 편중된 사회발전 문제를 풀 열쇠는 결국 사회적 대화”라고 말했다.

“한국노총에 새로운 에너지가 필요하다”

- 지난해 갑작스런 불출마 선언으로 한국노총 내부는 물론 노사정 관계자들도 당혹스러워했다. 불출마를 결심한 계기가 있었나.
“이제 하산 길을 걷다 보니 말하는 것이 굉장히 조심스럽다. 노동운동에 발을 들여놓은 후 13번의 선거를 치렀다. 한국노총 임원선거만 세 번을 했다. 사실 좀 에너지가 떨어지고 있었다. 스스로 에너지가 고갈되다 보니 새로운 에너지를 가진 사람이 나와 열심히 해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것보다 한국노총에 새로운 에너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스스로 (불출마 입장) 정리는 일찌감치 돼 있었다. 주변에서 재선에 대한 바람이 커서 답을 하기가 쉽지 않았을 뿐이다.”

- 임기를 마무리하는 심정은 어떤가.
“(한국노총 임원선거에서) 두 번이나 떨어지고 세 번 출마하는 전례 없는 기록을 세웠다. 그렇게까지 도전했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컸던 것은 먹고사는 문제, 즉 노동의 문제 중 핵심적인 부분을 해결하고 싶었다. 우리가 그토록 바랐던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이나 노동시간단축, 최저임금 인상 이런 문제 말이다. 한국노총 위원장이 된다면 힘 있게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나름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해 보니 쉽지는 않았다. 모든 일이 톱니바퀴처럼 엉켜 있다. 가려 해도 속도가 늦을 수밖에 없더라.”

- 기억에 남는 일을 꼽는다면.
“한국노총 내부적으로 변화를 시도한 부분은 작지만 진전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인사에 공정성을 기한 부분이나 청소용역 노동자들의 고용 문제를 개선한 부분, 재정자립을 위해 기여하고 싶었던 부분이 그렇다. 일본 강제징용 노동자상을 건립하고 단바망간기념관을 지원하는 데에도 앞장섰다. 사회연대 확대를 위해 사회공헌상을 만들고 북한 노동자들과 서울에서 축구대회도 열었다. 어느 때보다 현장과 소통을 활발하게 했다고 생각한다. 현장 목소리가 정부 정책에 반영될 때 많은 보람을 느꼈다. 극심한 갈등이 있었던 노선버스 노동자의 임금손실 없는 노동시간단축이나 과로사를 막기 위한 집배원 충원, 주한미군 한국인 노동자 인건비 확충 같은 산별연맹 문제를 중재하고 해결했다. 막판에 최저임금 산입범위가 확대된 점은 아쉽지만 한국노총 주도로 2년간 최저임금 인상을 끌고 갔다. ‘99% 상생연대’라는 협의체를 만들고 소상공인·자영업자들과 연대체를 만든 것은 소중한 성과다. 중소기업중앙회와 원·하청 불공정거래 문제를 풀기 위해 머리를 맞대기 시작했다. 합의 내용이 진전된다면 일정 부분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일본과 무역갈등이 최고조였을 때 리키오 코즈 일본노총(렌고) 위원장과 합의해 한일 노동계가 고용안정을 촉구하는 성명을 낸 것도 기억에 남는다.”

- 임기 중에 한국노총이 100만 조합원을 돌파했다.
“조직화에 3년을 매달렸다. 포스코노조를 설립하고 삼성전자노조도 만들었다. 취임하면서 10대 재벌에 노동조합이 없는 게 말이 되냐고 포스코와 삼성전자에 깃발을 꽂겠다고 약속했는데 이뤄 냈다. 파리바게뜨처럼 양 노총의 격전지가 된 곳도 문제를 잘 해결했다고 생각한다. 인천공항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과정에 힘을 쏟았는데, 성과가 있었다.”

- 지난해 고용노동부 노조 조직현황 발표로 인해 ‘1노총 지위 회복’이 27대 임원선거(21일 선거인대회) 열쇳말이 됐다. 플랫폼 노동자의 경우 노조에 가입하고 싶어도 경로가 잘 안 보인다. 한국노총의 조직적 한계도 있지 않나.
“조직사업은 나름 성과가 있었다고 자부했는데 요즘 초라하게 비춰져 할 말이 없다. 현장이 원하는 답을 만들지 못해 안타깝다. 오랫동안 기업단위 중심의 조직체계를 유지해 왔고 한계로 작용하는 것도 사실이다. 소속조직(전력노조)에서는 오래전부터 모든 노동자에 문호를 열고 확대한 성과들이 있었는데 아쉽다. 내 사업장 100% 조직화는 여전히 중요한 문제다. 어떻게 한국노총 울타리로 들어오게 할 것인가. 대중성을 갖추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 정기훈 기자

“사회적 대화 성공하려면 노사정 조금씩 내려놔야”

- 문재인 정부 들어 사회적 대화를 먼저 제안하고 경제사회노동위원회 기초를 닦았다. 지금의 사회적 대화를 어떻게 평가하나.
“사회적 대화가 만병통치약은 아니지만 우리 사회 양극화가 점점 심화하는 상황에서 사회적 갈등을 푸는 도구로 보다 성장시키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 원활한 사회적 대화를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사회적 대화 테이블에 앉으면 조금씩 내려놔야 할 부분이 있다. 정부든 사용자든 노동자든 누구든 그렇다. 그런데 노조에서 양보하면 조직을 팔아먹은 것처럼 매도한다. 한국노총 위원장직을 내려놓겠다는 각오가 있었기 때문에 지난해 2월 탄력적 근로시간제 관련 합의도 할 수 있었다. 나는 사회적 대화를 신봉한다.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2000년대 초반 극심한 갈등을 겪었던 한국전력 배전분할 문제를 사회적 대화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해결했다. 단 한 명의 희생 없이, 손해배상·가압류 없이, 정부도 크게 상처받지 않고 오로지 대화를 통해 지켜 낸 것이다. 사회 갈등은 점점 커질 것이다. 기후변화나 AI 같은 4차 산업혁명 부산물들이 가시화되면 고용 없는 성장과 부의 편중은 심화할 수밖에 없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면 답은 사회적 대화밖에 없다. 사회적 대화가 진전하려면 노사정 모두 절박함을 가져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가진 사람이 좀 더 마음을 열어야 대화가 잘된다. 정부가 사회적 대화를 활성화하기 위한 뒷받침을 해 줘야 한다. 세금이 들어가는 문제들인데 예산의 우선순위를 어디에 둘 것인가. 깊은 고민을 해야 한다.”

- 최근 스웨덴식 사회적 대화 ‘목요클럽’이나 공유경제 사회적 타협기구 ‘한걸음 모델’같이 새로운 사회적 대화기구를 만들려는 움직임이 있다.
“법적 사회적 대화기구를 배제하는 처사다. 새로운 사회적 갈등이 생길 때마다 새로운 대화기구를 만들어야 하나. 물론 케이스 바이 케이스(사례별)로 풀어 가는 방법도 있겠지만 결국 경사노위 무력화로 이어질 것이다. 기왕이면 사회적 대화 법적기구인 경사노위에서 주도해서 끌고 가는 것이 맞다. 사회적 대화가 거창해 보이지만 노사협상을 봐라. 노사 간 교섭을 하다 보면 사측 안도 있고 노측 안도 있다. 노조가 100가지를 내놨다고 100가지가 다 되는 것은 아니지 않나. 노조가 양보하는 상황은 단위조직에서도 늘 있다. 그런데 중앙단위로 가면 그게 안 된다. 중앙 노사단체가 점점 과격해진다. 누군가는 사회적 균형을 잡아 줘야 한다. 우리 사회가 건강하게 발전하려면 노사정이 그 역할을 해야 한다. 국회도 사회적 합의를 훼손 없이 존중해 줘야 한다. 그래야 다른 사회적 합의가 나올 수 있다.”

“노동자·국민 마음 얻기 위한 한국노총 콘텐츠 필요”

- 차기 집행부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한국노총 모토는 투쟁할 때 투쟁하고 협상할 때 협상하는 것이다. 노동자가 국민이고 국민이 바로 노동자다. 그들에게 한국노총이라는 이름으로 친근하게 다가가고 사회적 약자를 위한 보호막이 돼 줄 수 있는 보다 많은 콘텐츠가 필요하다. 한국노총이 위기라고 한다면 외부전문가를 포함한 혁신위원회를 만들어서 진지하게 평가하고 대안을 찾아야 한다. 정당들이 어려웠을 때 위기를 돌파했던 과정을 면밀하게 들여다보면 참고할 부분이 있을 것 같다. 국민 마음을, 노동자 마음을 얻기 위한 노력이 절실하다. 당선자는 경쟁 상대를 포용하고 조직을 통합해 조합원 신뢰를 얻고, 더 나아가 국민에게 신뢰받는 노동운동을 펼치길 바란다.”

- 한국노총의 ‘영원한 조합원’이 되겠다고 밝혔다. 앞으로 계획이 궁금하다.
“일단 밀린 잠을 푹 자고 싶다. 못 읽던 책도 있고 하면서 생각을 정리할 계획이다. 지금까지 내 삶을 스스로 개척해 왔다고 생각한다. 늘 부딪히고 깨지고 다시 일어나는 도전의 연속인 삶을 살았다. 그렇게 노동계 최고 대표자 자리까지 왔다. 앞으로는 내가 결정하는 게 쉽지 않을 것 같다. 주체적인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겠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