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나영 기자
“오전 10시나, 11시까지 오라고 했다. 그런데 대기하라고 하더라. 조금 후에 점심 먹고 한다고 했다. 먹고 오라는 얘기다. 그럼 늦게 오라고 하든지. 오후 4시쯤 스태프가 저녁 드시고 오라고 했다. 또 한 스태프가 ‘(밤) 9시 넘어 찍게 될 것 같다’고 이야기해 주더라.”

14일 오후 ‘아동·청소년 대중문화예술인 노동인권 개선 토론회’에서 공개된 아동·청소년 연기자·보호자들의 심층면접조사 내용이다. 아동과 청소년은 특별하게 보호받을 권리가 있는데도 방송·드라마·영화 촬영 현장에서 장시간 촬영, 인권침해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이 조사 결과다. 토론회 참석자들은 “최근 영화 <우리집> 감독은 촬영 시작 전 어린 배우를 위한 촬영 수칙을 발표하는 등 어린 연기자들을 보호하는 사례도 나오고 있지만 여전히 제작진의 선의에 기대야 하는 상황”이라며 “대중문화예술산업발전법(대중문화산업법)을 개정해 아동·청소년 대중문화예술인 인권을 보호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아동·청소년 대중문화예술인 노동인권 개선을 위한 ‘팝업’과 김영주·노웅래·민병두·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국회 의원회관에서 이날 토론회를 열었다.

76% “피해 참고 넘어가” 왜? “블랙리스트 두려워”

이종임 문화연대 집행위원은 19세 이하 아동·청소년 연기자 103명을 대상으로 드라마 제작현장 노동환경에 대해 조사한 결과를 발표했다. 연기자·보호자 10명에 대한 심층면접조사 결과도 공개했다. 조사는 지난해 5월13일부터 6월30일까지 진행했다. 조사 결과 대기시간을 포함한 하루 촬영시간이 12시간 이상 18시간 미만이라고 답한 비율은 36.89%(38명)로 가장 높았다. 6시간 이상 12시간 미만은 22.33%(23명), 18시간 이상 24시간 미만은 21.36%(22명), 6시간 미만 3.88%(4명) 순으로 나타났다. 24시간 이상이라는 응답자도 3명(2.91%)이나 있었다.

야간촬영도 빈번했다. 응답자의 68.96%(70명)가 야간촬영 참여 경험이 있었다. 이 중 야간촬영에 대한 당사자·보호자 동의를 구하지 않았다는 응답이 54.29%(38명)였다. 응답자의 69.90%(72명)는 “촬영기간 동안 평균 수면시간이 부족하다고 느낀다”고 답했다.

심층면접조사 대상자들은 자신의 촬영 차례가 올 때까지 현장에서 무한정 대기하면서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다고 토로했다. 기다리는 장소도 마땅치 않았다. 한 아동·청소년 연기자의 보호자 A씨는 “차에서도 못 쉬게 한다. 담요 덮고 편의점 의자에서 그렇게 기다렸다”며 “스태프들이 부르면 재깍재깍 나올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고 전했다.

욕설·외모지적을 비롯한 직·간접적 인격 모독 피해를 입었다고 한 응답자는 26.67%(28명)였다. 이들 중 “참고 넘어갔다”는 응답은 76%나 됐다. “따졌다”는 응답자는 1명밖에 없었다. 드라마 촬영시 입은 피해와 관련해 관련 기관 등에 신고한 경험이 있다고 답변한 응답자는 한 명도 없었다. 심층면접조사 대상자들은 공통적으로 드라마 제작 과정이나 임금·대우 등에 불만을 토로했다가 자칫 블랙리스트에 올라가 배역을 받을 수 없게 될 수 있다고 걱정했다.

“대중문화산업법 처벌 조항 거의 없어, 개정 필요”

김두나 변호사(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는 대중문화산업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해당 법이 아동·청소년 대중문화예술인에 대한 용역 제공시간 제한, 기본권 보장 등을 규정했지만 한계가 있다는 주장이다.

아동·청소년 연기자 용역 제공시간을 별도로 규정하고 있지만 세분화된 기준도 없다. 대중문화산업법은 아동·청소년 대중문화예술인을 15세 미만과 15세 이상으로 나눠 용역 제공시간을 제한하고 있다. 김두나 변호사는 “영·유아부터 미취학 아동, 취학 중인 아동 등 연령에 따른 성장·발달 단계를 고려한 기준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김 변호사는 “이 법은 신체적·정신적 건강, 학습권, 인격권, 수면권, 휴식권, 자유선택권 등 기본적 인권을 보장하는 조치를 계약에 포함해야 한다고 명시했다”며 “하지만 형사상 범죄행위에 해당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아동·청소년 대중문화예술인에 대한 인권침해 행위를 제재하는 규정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배우 허정도씨도 이날 토론회에 참여해 “유일한 관련 법인 대중문화산업법은 그 조문이 ‘알아서 잘 하라’는 수준으로 모호할 뿐 아니라 처벌조항이 거의 없어 어겨도 벌을 받지 않는다”며 “기본적 인권을 보장하는 구체적인 조항과 처벌조항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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