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재훈 여행작가

다시 한 번 남미, 그중에서도 볼리비아 우유니 얘기로 썰을 풀어 보려 한다. 많은 사람들이 우유니 소금사막을 여행 버킷 리스트의 첫 번째 자리에 올려놓지만, 정작 우유니에 대해서는 별생각이 없다. 소금사막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꼭 거쳐 가야 하는 마을이지만, 거쳐 가는 곳으로써의 의미 이상으로는 취급받지 못하는 마을. 우유니는 그런 씁쓸함을 운명처럼 안고 사는 마을이다. 마을로 들어서면 받는 인상도 역시 비슷하다. 높은 고도와 건조한 공기 그 자체로도 충분히 쓸쓸한데, 사막에서 불어오는 모래 먼지까지 더해지니 마치 방금 결투를 끝내고 잡목 덩어리들과 함께 시체들이 바닥에 뒹굴고 있을 법한 서부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할 정도다.

서울에서 출발해 리마·쿠스코·마추픽추를 거쳐 우유니에 도착할 때 즈음이면 여행자들은 대략 반쯤은 맛들이 가 있다. 스물네 시간 비행으로 일단 한 번 몸살을 앓은 뒤, 점점 높아지는 고도에 적응하기도 버거운데, 언제 다시 오겠냐는 마음에 리마부터 쿠스코, 마추픽추는 물론 티티카카 호수까지 빼놓지 않고 보려고 냈던 여행자스러운 욕심! 그렇게 부린 욕심은 이곳 우유니에 들어올 때쯤이면 정신적 피로를 가득 차게 하고, 체력은 바닥을 넘어 땅굴을 파게 하기 마련이다. 그렇게 온 우유니란 동네에 그다지 먹잘 것이 없다는 사실은 여행자를 더 지치게 만든다.

그렇게 폭발하기 직전인 객들을 우유니에서 구원해 준 오아시스 같은 곳이 바로 식당 ‘Kactus(칵투스)’였다. 스페인어 Cactus(선인장)에서 C 대신 K를 쓴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간판으로 보나 발음으로 보나 선인장 식당이 분명하다. 우유니 투어를 하다 보면 들르게 되는 사막 한가운데에 낯설게 자리 잡은 섬인 선인장 섬에서 그 이름을 따왔으리라 쉽게 짐작해 볼 수 있다. 각설하고 이곳이 왜 오아시스인지 직진해 보자.

그것은 다름 아닌 한국과 싱크로율이 엄청나게 높은 김치볶음밥과 라면이 있기 때문이다. 칵투스의 김치볶음밥은 안남미를 쓰지만 푸슬푸슬 날리지 않고 제법 끈기가 있다. 어찌 보면 리소토처럼 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나오기는 하지만, 나름 고추장 양념까지 더해 칼칼하게 매운맛이 그만이다! 그 맛에 자극을 받은 위가 꿀렁거리기 시작하면서 고산증에 저만치 가 있던 정신과 호흡이 비로소 돌아오고 있다는 걸 느끼게 된다. 여기에 마무리는 신라면 한 그릇! (무려 공깃밥도 추가할 수 있다. 유후~) 계란까지 하나 제대로 풀어진 신라면은 정말 끝내주게 잘 끓여서 나온다. 마치 한국에서 수십 년은 살았던 이가 끓여 주는 맛이랄까? 해발 4천미터 가까운 고지대에서 이런 유사 고향의 맛을 만나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그러니 우유니 시내에 머물던 이틀 동안 줄기차게 칵투스 식당을 찾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틀 동안 몇 번을 찾아가 끼니를 해결하면서,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라면을 맛있게 끓일 수 있는 걸까가 모두의 궁금증이었다. 그러다가 일행 중 누군가가 우연히 발견한 면발에서 라면 맛의 비밀을, 그 실마리를 찾아내고야 말았다. 보통 우리가 먹는 신라면보다 얇은 면발! 뭔가 수상했다. 이래저래 추측을 주고받던 일행은 이 면발은 틀림없이 ‘컵라면’ 면발이라는 데 의견 일치를 봤다. 마침 계산을 하러 주방 앞 카운터에 갔다가 주방 안쪽에 가득 쌓여 있는 컵라면을 보고 나자 모든 의문이 풀렸다. 그랬다! 칵투스에서 끓여 나오는 신라면은 봉지라면이 아니라 컵라면이었다. 컵라면을 냄비에 끓여 그릇에 담아 내오는 통에 정체를 알 수 없었던 것! 무릇 비법이라는 것들이 알고 나면 ‘애걔~ 그거였어~’ 하는 말이 나오기 마련인데, 칵투스 라면 맛의 비법도 역시 ‘애걔~’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오지랖 넓은 일행 중 한 명이 메뉴판의 김치볶음밥과 고추장 불고기 영어표기를 고쳐 주느라 수선을 피운 뒤(한글문화연대 남미 홍보대사로 임명됐다는 설이 있다), 가게를 나서려는데 주인장이 손을 잡아끌더니 잠시만 기다려 달란다. 금세 주방에서 컵라면 네 종류를 가지고 나왔다. 아주 잠깐 동안 메뉴판을 고쳐 준 사례로 컵라면 하나씩 주시기라도 하려나 하는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지만, 착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주인장은 신라면 이외에 튀김우동·김치라면·새우탕면도 메뉴에 추가하고 싶었는데, 이걸 한글과 영어로 어떻게 표기해야 할지 몰라서 물어보려고 가져온 것이었을 뿐이었다. 결국 구메뉴판 고치는 일에, 신메뉴를 위한 메뉴판까지 써 주게 된 셈. 왠지 모를 아쉬운 마음을 티 나지 않게 털어 내며 네 종류의 컵라면 이름을 정성스레 써 주고 작별 인사를 했다.

선인장 식당! 지금쯤 어느 한국 여행객이 소금사막으로 갈 기대에 부푼 채, 새우탕면을 먹으며 감동하고 있겠지? 다녀온 지 2년밖에 안 지났는데 벌써 그리워지는 건 역시 여행중독증?!

여행작가 (ecocj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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