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은호 한국노총 대변인

한 해가 저물고 있습니다. 이즈음에 가장 많이 쓰이는 말은 아마도 ‘송구영신’일 것입니다.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자는 얘기지요.

‘묵다’는 것은 오래된 것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달리 보면 ‘익숙함’으로도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요.

오래되다 보면 익숙해지기 마련이죠. 익숙함이란 것은 환경일 수도 있고, 개인의 습관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연말이 되면 익숙함을 보내고 익숙하지 않은 새로운 것들을 만드는 목표를 세우곤 합니다.

다이어트나 금연 등은 익숙함과의 이별입니다. 내 몸에 익숙하게 자리 잡은 ‘살’과의 이별을 위해 익숙하지 않은 운동을 합니다. 느닷없는 주인의 행동에 몸은 괴로워하지요. 식사 후 혹은 술을 마실 때 익숙하게 손에 잡히는 담배와의 이별 또한 새해를 맞이하는 우리의 오래된 목표입니다.

익숙함으로 인해 영화를 보다가 소스라친 경험이 있습니다. 집주인은 아들 생일에 가족과 함께 캠핑을 떠났습니다. 운전사·가정부·과외선생(이들은 모두 가족이죠)은 주인 없는 저택의 거실에 모여 양주와 안주를 펼쳐 놓고 파티를 엽니다.

파티 분위기가 한창 고조될 때 조금씩 내리던 비는 폭우가 돼 쏟아집니다. 영화 <기생충>의 한 장면입니다. 영화는 폭우가 퍼붓는 시점부터 돌이킬 수 없는 사건으로 폭주를 시작합니다.

눈치 빠른 관객은 비가 오기 시작하면서 ‘아, 캠핑 간 집주인이 돌아오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왁자지껄한 술 파티에서 나누던 그들의 대화에 함께 웃던 저 역시 비가 오기 시작하자 불안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들의 집은 취객이 창에 대고 노상방뇨를 하는 반지하입니다. 그것을 알고 있지만 ‘들키지 말아야 할 텐데’라기보다는 ‘빨리 자기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라고 생각합니다. 제 머릿속에 그들의 계급적 위치는 익숙하게 자리 잡고 있었던 겁니다.

영화가 아닌 실제 사회에서 일어나는 비극 역시 익숙하게 받아들일 때가 있습니다. 서른세 살 젊은 엄마는 세 살 된 딸과 함께 제주행 비행기를 탔습니다. 오는 비행기표는 예매하지 않았습니다. 사흘간 묵었던 숙소에서 번개탄을 피웠습니다. 그러나 끝내고 싶던 불행은 모질게 질겼고 모녀는 겨울 바다로 향합니다.

찬 바닷바람을 막기 위해 아이를 덮은 이불을 꼭 감싸 안은 엄마, 그들이 CCTV를 통해 세상에 남긴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아이와 엄마는 엿새 간격으로 20킬로미터 떨어진 바닷가에서 발견됐습니다.

지난해 11월 발생한 사건입니다. 이 비극이 있기 전 ‘송파 세 모녀’ 사건이 있었고 그 뒤 ‘성북 네 모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지난 크리스마스에는 대구 일가족이 함께 목숨을 끊은 비극이 있었지요.

이런 보도를 접할 때 우리는 잠시 우울해하고 슬퍼하지만 곧 익숙한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익숙함에 반비례해서 슬픔과 분노의 감정 크기는 점차 줄어듭니다.

한 해가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새해를 앞두고 많은 사람들이 새로움과 변화를 바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내 안의 익숙함과 이별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희망은 어쩌면 우리가 가 보지 않은 낯선 길 너머에 있을지도 모를 테니까요.

한국노총 대변인 (labornews@hanmail.net)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