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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민주공화국의 위기가!
▲ 한지원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원

청와대 민정수석실 권력남용 의혹이 선거개입 의혹으로 확대됐다. 지난해 울산시장선거에서 대통령 측근을 당선시키기 위해 더불어민주당 공천부터 경쟁후보의 비리수사까지 청와대가 개입했다는 의혹이다. 불법 여부에 대해서는 좀 더 지켜봐야 알겠지만, 어쨌거나 유재수씨 감찰 무마, 백원우씨의 비밀 별동대 운영 등 민정수석실을 둘러싼 다른 의혹도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중이다. 도대체 청와대에서는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왜 자칭 촛불혁명 정부에서 박근혜 국정농단과 비슷한 권력남용 의혹이 제기되는 것일까.

권력남용의 불법 여부는 수사를 좀 더 지켜봐야 하겠지만, 의혹 자체는 청와대가 자초했다고 볼 수 있다. 제왕적 대통령제 개혁을 내걸고 당선된 현 정부가 결과적으로 대통령 권력을 그다지 줄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민정수석실은 대통령 권력의 코어였다. 대통령 권력에 비례해 민정수석실도 항상 논란의 중심에 서게 돼 있다. 심지어 현 민정수석실은 적폐청산 전진기지 역할까지 맡았다. 현 권력기관만이 아니라 과거 권력기관까지 다루니 권력남용 시비에 휘말릴 수밖에 없다.

문재인 대통령은 촛불항쟁 결과로 당선됐다. 제왕적 대통령제를 개혁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청와대 수석보좌관들이 내각보다 우위에 섰고, 차분한 제도개혁보다 대통령이 여론의 관심을 몰고 다니는 ‘쇼통’에 치우쳤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제1 야당을 적폐로 몰아붙이니 의회정치가 작동될 리 없었다. 이런 결과 요즘 정치는 ‘문빠’와 ‘문까’로 나뉜다는 말이 나올 만큼 대통령이 절대적 지위를 차지하게 됐다.

문 대통령과 집권여당은 제왕적 대통령제를 버릴 생각이 애당초 없었던 것 같다. 단적으로 청와대가 2018년에 제출한 개헌안이 속내를 보여줬다. 개헌안은 의원내각제와 이원집정제 같은 대통령 권력에 대한 구조적 변화가 아니라 대통령의 재선 욕구로 스스로를 규제하게 만들겠다는 4년 중임제였다. 제왕을 없애고 민주공화국을 개선하자고 했더니, 선한 제왕을 대안으로 내세운 셈이다. 주목하는 것은 각종 의혹의 진위 여부보다 현 정부의 권력개혁 부진이 한국 사회에 장기적으로 미칠 영향이다. 국민이 “이게 나라냐”고 외치며 대통령을 탄핵시켰는데 “기껏해야 이런 게 나라구나”라고 좌절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우려된다.

서유럽의 근대 정치체제에 큰 영향을 미친 헬레니즘 시대 철학자 폴리비오스의 정체순환론으로 한국의 향후 정치를 예상해 보겠다. 폴리비오스는 정치체제가 세습 왕이 통치하는 ‘군주정’으로 시작해, 엘리트들이 통치하는 ‘귀족정’을 거쳐, 민중이 선출한 대표가 통치하는 ‘민주정’으로 나아간다고 분석했다. 군주정은 폭군이 왕을 세습할 때 타락하고, 귀족의 반란으로 몰락한다. 귀족정은 엘리트들의 경쟁 속에서 소수 귀족이 권력을 과점할 때 타락하고, 민중에 의해 타도된다. 민주정은 선출된 대표들이 민중을 지대추구적 행동으로 유혹할 때 타락하고, 타락한 민중이 폭민이 돼 기득권 타파라는 명분으로 새로운 지도자를 내세워 민주정을 폐지하면서 몰락한다. 그리고 이 새로운 지도자가 스스로 군주로 나서며 군주정이 다시 시작된다.

그는 끝없는 타락의 순환을 완화하기 위해서는 ‘혼합정’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혼합정은 ‘군주-귀족-민주’가 서로 견제하면서 타락을 예방하는 정치체제다. 민주정보다 혼합정이 훨씬 안정적이다. 하지만 이런 혼합정도 쇠퇴하고 몰락한다. 오랜 번영의 부정적 효과로 민중이 지적·윤리적으로 퇴보하기 때문이다. 민중은 탐욕에 사로잡혀 서로를 공격하고 결국에는 정치체제까지 스스로 파괴한다. 즉 민중이 정념에만 사로잡힌 폭민이 되면 혼합정의 균형이 무너진다. 그리고 타락의 악순환이 반복된다.

오늘날 서유럽의 정치체제인 ‘내각총리-상원-하원’ 구조가 혼합정의 현대적 형태다. 영국에서 입헌군주제와 의원내각제를 만들 때 폴리비오스의 이론이 실제로 영향을 미친 결과다. 심지어 최근 포퓰리즘으로 불리는 기존 정치체제의 위기가 확대되면서 폴리비오스가 말한 혼합정의 위기도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중이다. 물론 현대 정치체제에서 군주정이 다시 출현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폴리비오스의 이야기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자면, 폭민을 포퓰리즘으로, 혼합정의 파괴를 의회정치의 정지, 권력농단의 반복, 대중 정치에 대한 환멸과 무관심 등으로 해석해 볼 수 있다. 즉 혼합정이나 민주정의 타락은 포퓰리즘 확대이고, 새로운 군주정은 의회정치가 작동중지된 상태에서 메시아적 지도자가 멋대로 나라를 이끄는 상황이라 하겠다.

한국의 현 정치체제는 사실 혼합정에도 미달하는 민주정 수준이다. 30년간 이어지는 개헌 논의가 그 증거다. 개헌은 민주정을 혼합정으로 안정화해 보자는 시도인데, 1987년 직선제 개헌 이후 개헌은 매번 왈가왈부하다 실패했다. 단적으로 대통령제에서 대통령이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은 정치체제 자체가 전혀 안정적이지 못하다는 방증이다. 해외로 망명한 이승만, 부하의 총에 살해된 박정희, 부패와 학살로 구속된 전두환·노태우, 자식들이 구속된 김영삼·김대중, 스스로 목숨을 끊은 노무현, 부패비리로 구속된 이명박, 국정농단으로 탄핵된 박근혜. 지금껏 단 한 명의 대통령도 제대로 살아남지 못한 것이 한국정치 70년의 역사다. 과연 이런 상태를 제대로 된 정치체제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런데 촛불혁명 정부를 자처한 문재인 대통령까지 전임들의 역사를 따라가려 하는 것 같다. 내 생각에 민정수석실 의혹은 그 징조다. 올해 하반기 내내 서울 서초동과 광화문에서 개최된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조국 찬반 두 집회도 폴리비오스가 폭민의 등장을 경고했던 상황과 비슷하다. 마침내, 민주공화국의 회복 불가능한 위기가 도래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우리나라 국민은 불과 3년 전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헌법 1조를 노래하며 박근혜를 탄핵했다. 그런데 이제와 보면 민주공화국이 무엇인지 촛불은 정확히 인식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 틈새를 비집고 더불어민주당이 집권했다. 하지만 그들이 구상한 민주공화국은 실은 민주정을 더 빠르게 타락시키는 것에 불과했다. 2020년 노동자운동은 현 집권세력과 단호하게 결별해야 한다. 그리고 진정 민주공화국이 무엇인지 다시 처음부터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원 (jwhan77@gmail.com)

한지원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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