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형탁 노회찬재단 사무총장

교수신문이 선정한 올해의 사자성어는 공명지조(共命之鳥)다. 불경에 나오는 히말라야 설산에 사는 전설의 새다. 한 몸에 두 개의 머리를 갖고 있다. 한 놈은 낮에 일어나고, 또 한 놈은 밤에 일어나는데 일어난 놈이 자는 놈을 지켜 주며 살아간다. 그런데 한 놈의 질투심으로 공동으로 사용하는 몸을 간수하지 못하고 결국에는 같이 죽어 버리고 만다. 이게 지금 한국 사회 현실을 잘 나타내고 있다고 한다. 사자성어 선정 투표에 참여한 교수들이 가장 많이 선택했다.

공명조와 다른 예로 비익조가 있다. 암컷과 수컷이 각각 눈과 날개를 하나씩만 가지고 있다. 불완전한 모습의 이 새는 쌍을 이루지 않으면 날 수 없고 그러기에 살 수도 없다. 공명조가 한 몸을 이루면서도 그 몸을 관리하지 못하는 반면 비익조는 불완전하기에 상대를 자신의 목숨과 같이 다룬다.

현재 한국 사회가 공명조의 모습을 보인다고 해서 가장 많은 교수들의 선택을 받은 것이지만, 따지고 보면 현재가 아니라 원래 모든 사회나 조직이 공명조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공명조는 사회의 지극히 당연한 모습이다. 불경에서 말하는 바는 무엇 하나 변한 것 없어도 결국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면 극락이지만, 의심하고 질투하면 지옥이 된다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로 ‘공유지의 비극’이 있다. 공유지는 개인 소유가 아닌 공동체가 함께 사용하는 땅이다. 옛 시절 땔감을 공동으로 얻을 수 있었던 동네 뒷산을 생각하면 되겠다. 넓게는 물과 공기도 공유지에 해당한다. 공유지의 비극은 사람들은 개인적인 욕심을 우선하기에 공동체 전체가 고루 사용할 수 있는 수준 이상으로 공유지를 파헤치게 돼 결국은 공유지가 황폐화되고 공동체 자체가 사라진다는 이론이다. 그러나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오스트롬 교수는 인류가 공유지를 잘 관리한 사례가 아주 많음을 밝히고, 공유자원 관리 능력에서 미래 희망을 찾고자 했다.

왜 한 몸으로 서로를 보호하며 잘살 수 있었던 공명조가 결국에는 죽음의 파탄에 이르게 됐을까? 그것은 몸은 같이하지만 생각과 목표는 같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공명조의 비유를 들어 우리나라 정치권 행태를 비판하는 데 초점을 맞추지만, 실상은 모든 조직이 이러한 상황에 처해 있다. 정치권은 시쳇말로 술안줏감으로 씹어 대기 좋고, 자신의 허물을 가려 주기에 적절한 연극일 뿐이다. 자신의 조직, 자신의 활동 공간을 돌아보면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결국은 같은 양상이 벌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생각과 목표를 같이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미래를 공유하는 것이다. 공명조는 현재의 몸은 공유했지만, 미래를 공유하지 못했기 때문에 비극에 이르렀다. 모든 조직은 달성하기 위한 목표를 세우고 또 실현 계획을 짠다. 그런데 대부분의 목표와 계획은 경쟁구도를 전제로 짜인다. 이 구도 속에서의 경쟁력은 다른 사람이나 조직이 따라하지 못할 독특함이다. 남들이 가지지 못한 기술, 다른 조직이 얻지 못한 능력 있는 인재가 경쟁력의 원천이 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공유지의 비극은 시작된다.

차원을 하나 더 높여서 그 모든 조직이 발을 딛고 있는 사회를 생각해 보면 이 비극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나라의 경쟁력은 어디에서 나올까? 국제적인 기관에서 산출한 국가경쟁력 지표를 발표할 때 늘 우리 언론에 등장하는 노사관계 경쟁력은 어떻게 형성될까? 그것은 서로의 독특함을 내세우는 속에서는 결코 발생하지 않는다. 그것은 전체를 볼 줄 아는 안목과 미래를 헤아릴 수 있는 지혜 속에서 생겨난다.

언제부터인가 이 나라에는 시나리오가 없어졌다. 해방 이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의 시나리오가 무산됐다. 4·19 이후에는 어설프긴 했지만 민주당 정부가 세운 시나리오가 좌절됐다. 대신 군사정부가 그 시나리오를 이어받아 강제적 수단을 동원해 밀어붙였다. 1980년의 봄은 꿈으로 기억되고, 87년은 각자도생의 아픔으로 이어지고 있다. 나라 수장을 감옥으로 들어가게 만든 역사적 사건은 벌써 아름다웠던 옛 추억으로 남고 있다. ‘공유하는 미래’라는 시나리오가 없으니, 현재의 모든 행위는 과거의 경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경로의존성이라는 지겨운 변명만 현재를 설명하는 유일한 버팀목이다.

이 사회의 미래를 준비하는 시나리오가 필요하다. 비록 경로의존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손 치더라도 앞으로는 다양한 경로가 가능하다. 무엇이 나의 조직과 우리 사회의 바람직한 미래인지에 대해 가능한 경로를 추려 내고, 그중에서 가장 훌륭한 경로를 찾아 공동의 목표를 세워야 한다. 공유지는 관리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끈기 있는 설득을 해야 한다. 적어도 이 사회의 지도자들이라면(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이 바로 지도자다) 정치꾼들의 어처구니없는 가면놀음의 구경꾼·참견꾼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바로, 당장, 나로부터 실천할 수 있는 시나리오를 만드는 일을 함께 시작해야 한다. 전태일 50주기이자 노회찬 2주기인 2020년을 그런 해로 만들었으면 좋겠다.

노회찬재단 사무총장 (htkim8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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