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PDATE : 2020.6.4 목 13:18
상단여백
HOME 칼럼 연재칼럼 민변 노동위의 노변政담
영화계 주 52시간 준수 움직임에 재를 뿌려서야권영국 변호사(전 민변 노동위원장)
▲ 권영국 변호사(전 민변 노동위원장)

11월13일 론스타펀드의 외환은행 먹튀 사건을 다룬 정지영 감독의 영화 <블랙머니>가 개봉돼 현재까지 관객 200만명을 돌파하며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주연배우와 실화에 근거한 탄탄한 시나리오가 널리 회자되고 있는 데 비해 영화제작 과정의 모범적인 노동조건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블랙머니> 제작사 질라라비(대표 양기환)가 ‘공정노동준수협약’을 통해 영화계 최초로 보조출연자 중간착취 관행을 개선한 것이다.

영화 제작 과정에서 보조출연자는 그간 인력공급 기획사가 공급했다. 기획사가 제작사와 인력공급계약을 맺고 기획사가 보조출연자 출연료 중 평균 10%대, 많게는 30%대까지 중간수수료를 취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올해 6월 <블랙머니> 제작사 질라라비와 전국보조출연자노조·한국노동복지센터는 영화제작 과정에서 적용하는 공정노동준수협약을 체결했다. ‘노동존중 사회로 가는 사회공익활동 공동협약서’라는 별칭을 가진 공동협약에는 공급받은 보조출연자에게 노동관계법을 준수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실제 105명의 보조출연자가 공동협약을 적용받고 일했다. 공동협약에는 “질라라비는 노동관계법을 준수하고 파견용역업체를 통한 간접고용으로 중간착취가 일어나지 않도록 관계기관 허가를 받은 적법한 단체인 노조로부터 직접 인력공급을 받도록 노력한다”는 조항이 포함됐다. 중간수수료가 없어지고, 제작사가 보조출연자를 직접 계약하는 효과를 냈다. 공동협약 당사자들은 이를 ‘직접고용’이라고 표현했다.

근로기준법은 “누구든지 법률에 따르지 아니하고는 영리로 다른 사람의 취업에 개입하거나 중간인으로서 이익을 취득하지 못한다”(9조)는 중간착취 배제 규정을 두고 있다. 질라라비는 직업안정법상 근로자공급사업(33조)을 허용하는 노동조합과의 공동협약을 통해 보조출연자를 공급받음으로써 중간수수료 없이 보조출연자에게 임금 전액을 지급했다.

올해 5월30일 개봉해 1천만 관객을 동원한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은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한국 최초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이라는 영예 뒤에 숨겨진 더 놀라운 사실은 모든 스태프들과 표준근로계약서를 작성하고 주 52시간(연장근로 12시간 포함) 상한제를 준수하며 영화를 제작했다는 사실이었다.

영화제작업은 지난해 7월1일 이전까지 ‘근로시간 및 휴게시간 특례’업종(무제한 근로가 가능한 업종)으로 분류돼 노동시간 적용대상에서 제외돼 왔다. 영화스태프들을 ‘프리랜서’라고 부르며 노동자성을 부정한 결과 영화계에서는 장시간 노동과 최저임금에 미치지 못하는 임금이 관행처럼 여겨졌다. 2015년 발표된 고용노동부 보고서에 따르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월평균 노동시간(142.16시간)보다 영화계 노동시간이 169.74시간 더 길고, 한국 월평균 노동시간 171시간보다 140.9시간 더 길다. 영화계 종사자 노동시간이 평균 노동시간의 거의 두 배에 달함을 알 수 있다.

11월26일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정의당의 ‘주 52시간 상한제 사수를 위한 비상행동’ 길거리 버스킹에 초대된 안병호 영화산업노조 위원장은 자신은 촬영(?) 업무에 종사했는데 무려 72시간 동안 촬영장을 떠나지 못한 경험이 있다고 했다. 밤샘 촬영이 너무도 당연한 것처럼 돼 있고, 스태프들이 개인 생활을 생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며, 밤샘 촬영 후 장비를 운반하던 스태프가 졸음운전으로 중대사고를 낸 목격담까지 털어놨다. 주 80시간에서 100시간 노동이 다반사라고 했다. 노동부 과로사 인정기준인 발병 전 12주 동안 주 평균 60시간(4주 동안 주 평균 64시간)을 훨씬 초과한다.

지난해 3월 근로기준법 개정으로 26개 업종에 달하던 근로시간 및 휴게시간 특례업종이 5개 업종으로 축소됐다. 그 결과 영화제작업과 방송업도 특례업종에서 제외됐다. 영화제작업이 주 52시간 상한제를 준수해야 하는 업종이 된 것이다. 안병호 위원장은 영화계 종사자들이 주 52시간 상한제 시행을 앞두고 영화제작 환경을 개선해 나가고 있다고 했다. 영화노동자들도 이제 자신의 생활을 가질 수 있게 됐다며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블랙머니>는 보조출연자 중간착취 없이 작품성 있는 영화제작이 가능함을 보여 줬다. <기생충>은 법적 노동시간 상한을 준수하면서 세계 최고의 영화를 제작할 수 있음을 보여 줬다.

그런데 11월18일 정부는 내년 1월1일부터 주 52시간 상한제가 시행되는 50명 이상 300명 미만 사업장에 최소 6개월 이상 계도기간을 부여하고, 근로기준법 시행규칙에서 규정하고 있는 특별연장근로 인가사유를 최대한 확대하겠다고 발표했다. 일시적인 업무량 급증 같은 경영상 사유를 특별연장근로 인가사유에 포함하도록 시행규칙을 개정하겠다는 것이다. 특별연장근로는 주 12시간 연장근로 제한을 초과하는 '제한 없는 연장근로'를 의미한다.

영화제작업이나 방송업에서 일시적인 업무량 급증은 따 놓은 당상이다. 영화제작이나 방송기획에 따라 업무량이 증가하는 일은 다반사로 일어날 것이다. 영화노동자들의 저녁 있는 삶에 대한 꿈은 다시 물거품이 될 것인가. 또다시 과로사를 걱정해야 하는 과거로 돌아갈 것인가. 주 52시간 상한제 안착을 걱정한다는 정부가 앞장서서 재를 뿌리고 있다.

권영국  labortoday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권영국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