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덕 변호사가 11월26일자 매일노동뉴스 칼럼 '파업, 노동자의 자유, 그리고 홍콩'에서 필자의 24일자 칼럼 '홍콩은 광주가 아니다'에 의견을 주셨다. 이 글 목적은 김 변호사 칼럼에 대한 반론이라기보다 필자의 '홍콩' 칼럼 보론으로 다양한 시각을 소개하는 데 있다. 사안의 민감성에도 지면을 내준 매일노동뉴스에 고마움을 전한다.

첫째, 송환법 문제다. 송환법은 보통 국가라면 다 갖고 있다. 10월22일 미국 법무부는 세계 최대 아동음란물 사이트를 운영하던 한국인을 “직접 처벌하겠다”며 한국 정부에 강제송환을 요구했다. 한국 사법부의 솜방망이 처벌에 경종을 울린 것이라 언론은 평가했다. 촛불시위를 진압하는 군사쿠데타를 기획한 기무사령관 조현천은 미국에 있다. 미국 정부의 비공식 입장은 조현천이 정치범으로 탄압받을 가능성이 커서 송환할 수 없다는 것이다. 홍콩 사태의 계기인 송환법은 시위로 그 추진이 취소됐다. 덕분에 애인을 대만으로 유인해 살해하고 홍콩으로 돌아온 찬퉁카이는 석방됐다. 홍콩 정부가 올해 4월부터 범죄인 인도 법안을 추진하게 된 것은 지난해 2월 그가 대만에서 저지른 살인사건에서 비롯됐다. 홍콩의 범죄인이 피해자를 한국으로 데려와 살해하고 홍콩으로 도주할 경우 한국 정부는 송환을 요구할 수 없게 됐다.

둘째, 시위대에 관한 문제다. 광주가 총을 든 건 군대가 발포했기 때문이다. 홍콩에서는 중국군의 발포는커녕 진압도 없다. 한국의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이 시위를 나가며 망치·스패너·단검을 준비하는 걸 본 적이 없다. 그런 흉기를 고립된 경찰에게 휘두르는 걸 본 적이 없다. 홍콩이공대 시위에서 사용된 경기용 활은 살인무기다. 지하철공사가 경찰에 협조한다는 이유로 한국 시위대가 지하철역을 파괴하고 매표기를 박살 내고 돌과 화염병을 투척한 적이 없다. 한국에서 경찰이 '토끼몰이'를 하지 않는데 시위대 스스로 대학교로 철수해 바리케이드를 쌓고, 건물을 파손하고, 인근 고속도로 통행을 방해하려 방화하는 걸 본 적이 없다. 필자가 보기에 한국 시위대의 폭력성은 방어적 성격이 큰 반면 홍콩의 그것은 공격적 성격(vandalism)이 크다.

셋째, 홍콩 사태가 자유주의운동에서 민중운동으로 성장할 수 있느냐다. 지금 한국의 조직노동(organised labour)은 민중으로부터 괴리됐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영세 사업장 조합원들이 유입되지만, 조직노동의 주력은 상위 20%에 속해 있다. 1970년대와 80년대 한국의 노동운동이 성장할 때는 그렇지 않았다. 노동운동은 바로 민중운동이었고, 조직 노동자가 바로 서민이었다.

홍콩 시위대 주력은 학생과 중산층이다. 홍콩 금융가 직장인들이 점심 시위에 참가했다는 소식을 전하며 87년 6월 넥타이부대를 언급하는 보도는 순진하다. 6월 항쟁의 넥타이부대는 '블루칼라' 노동자와의 연대를 당연하게 여겼다. 6월 항쟁은 그해 7·8·9월의 노동자대투쟁으로 폭발했다.

2019년 홍콩의 대학생-중산층을 87년 한국의 대학생-중산층과 같은 반열에 놓고 동질화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못하다. '기회의 평등'이라는 미명하에 지금 한국의 스카이(SKY) 대학생들이 보이는 능력주의(meritocracy) 편향은 홍콩의 대학생이나 중산층이라고 다르지 않다. 홍콩 시위대 핵심 세대와 계급 특성은 '기회 평등 YES, 결과 평등 NO'를 외쳤던 한국 공공기관 정규직노조의 젊은 조합원들과 다르지 않다. 노동운동이 물심양면으로 촛불항쟁을 열심히 뒷바라지했지만 중산층 시민들은 자신들이 잘나서 된 것이라 믿는 것과 이치가 비슷하다.

넷째, 일국양제 문제다. 84년 12월 영국 총리 마거릿 대처와 중국 총리 자오쯔양 간에 중영연합성명(Sino-British Joint Declaration)이 체결됐다. 이 성명은 홍콩 기본법의 뼈대가 된다. 성명은 두 가지를 보장했다. 첫째, 1840년 이후 대영제국이 점령한 청나라 영토 홍콩섬 및 구룡반도의 주권과 1898년부터 대영제국이 조차한 청나라 영토 신계의 주권을 97년 7월부로 중국에 귀속시킨다. 둘째, 중국은 2047년까지 사회주의 체제를 홍콩에 강요하지 않고 영국 제국주의가 홍콩에 이식해 놓은 사회체제·경제체제·생활방식(life style)을 그대로 유지한다. 덕분에 97년 7월 이후 홍콩에서 '자유방임' 자본주의라는 식민체제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소유권·토지권·상속권·주택임대권·조세 등 모든 영역에서 식민체제를 그대로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홍콩을 다스린 모든 영국 총독들은 97년 반환 때까지 홍콩 시민의 '선거나 협의'가 아닌 런던의 '일방적 임명'으로 부임했다.

미국 우익 싱크탱크 케이토연구소(CATO INSTITUTE)가 발행한 <2018 인간 자유 지수(The Human Freedom Index 2018)>에 따르면 조사 대상 162개국에서 홍콩은 뉴질랜드와 스위스에 이어 세계 3위다(영국 8위, 미국 17위, 한국 27위). 보고서의 '경제 자유(economic freedom)' 지수에서 홍콩은 세계 1위를 기록했다. 세계 1위의 '경제 자유'를 누리는 홍콩에서 세계 최악의 주택 문제와 경제 불평등이 심화하는 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 최근 홍콩 기초선거에서 '민주파'가 압승했지만 사회경제 모순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다. 한국 지방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이 압승했지만 피부로 느끼는 변화가 없는 것과 비슷하다.

필자는 한국 노동운동이 홍콩 사태에 관해 건설적인 논의를 하려면 두 가지 입장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째, '홍콩 자유'를 '홍콩 독립'과 혼동하면 안 된다. 독도가 한국 땅이듯 홍콩은 중국 땅이다. 둘째, 평화적 민주화운동과 폭력적 친미-친영운동을 혼동하면 안 된다. 미국과 영국이 주도한 가운데 국제사회가 약속한 '일국양제'와 '하나의 중국' 원칙은 결코 가볍지 않다.

아시아노사관계컨설턴트 (webmaster@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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