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우람 기자
서울 중구 다동에 위치한 금융노조 사무실에 얼마 전부터 대형 게시물이 붙어 있다. 노조 사무실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대자보나 성명이 아니다. 인기배우가 주연을 맡은 최신 영화 포스터다. "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문구가 눈에 띈다. 노조는 “최근 산하 37개 지부에 공문을 보내 영화 <블랙머니> 홍보와 조합원 단체관람을 요청했다”고 21일 밝혔다. 노조는 <블랙머니>를 “국민 금융교과서”라고 소개했다.

대한민국 최대 금융스캔들인 ‘론스타 사건’을 다룬 <블랙머니>가 이달 13일 개봉했다. 5일 만에 관객 100만명을 돌파했다. 21일 현재 누적관객이 138만명을 웃돌고 있다. 노동계와 시민·사회단체는 영화 흥행을 계기로 론스타 사건 재조명에 나섰다. 포스터 표현처럼 론스타 사건은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투기자본과 모피아 유착, 최악의 금융스캔들=금융정의연대·참여연대·민변 국제통상위원회·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학술단체협의회가 지난 20일 저녁 서울 종로구 서울극장에서 <블랙머니>를 단체관람했다. 론스타 사건은 외환위기 이후 부실화된 옛 외환은행을 2003년 미국계 사모펀드인 론스타가 헐값에 인수하면서 시작됐다. 2012년 하나금융지주에 이를 다시 매각하면서 4조6천600억원에 달하는 막대한 이익을 챙기고 한국을 떠났다. 외국 투기자본과 모피아(기획재정부+마피아)의 유착이 부른 최악의 금융사건으로 꼽힌다.

영화는 2011년 5월16일을 기점으로 시작된다. 금융위원회가 스타펀드(론스타)의 대한은행(옛 외환은행) 매각을 심의하는 73일의 과정을 담고 있다. 헐값 매각이 가능했던 것은 외압에 의해 외환은행 BIS(위험자산 대비 자기자본) 비율이 조작됐기 때문이라는 의혹이 있다. 영화는 초반 BIS 비율 조작에 연루된 두 사람이 의문의 손에 의해 살해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 과정에서 성추행범으로 몰린 검사 양민혁(조진웅)이 사건의 실체를 파헤치는 과정을 보여 준다.

살인을 제외한 영화적 설정은 모두 실제 발생한 사건에 기인해 짜여졌다. 론스타 매각에 반대했던 외환은행 노동자들의 투쟁은 주인공의 각성을 부르는 중요한 장치로 사용된다. 영화는 노동자들의 집회에서 마이크를 잡은 주인공을 끝으로 마무리된다. <남영동1985>를 연출한 정지영 감독 작품이다.

◇"ISD 패소하면 5조4천700억원 날아가"=단체관람 후 감독과 함께하는 토크콘서트가 이어졌다. 공교롭게 이날 <겨울왕국2>가 개봉했다. 정지영 감독은 “미국 거대자본이 약소국 국민에게 손해를 끼치는 영화 속 상황과 <블랙머니>가 처한 현실이 겹친다”며 “<겨울왕국2>가 개봉하면서 <블랙머니> 스크린수가 70% 사라질 것”이라고 씁쓸해했다.

민변 국제통상위원장으로 일했던 송기호 변호사는 관객들에게 <블랙머니> 이후 상황을 설명했다. 론스타는 현재 한국 정부를 상대로 투자자-국가 간 소송(ISD)을 제기한 상태다.

“론스타가 제기한 2012년 소송이 아직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미국·영국·프랑스 변호사가 재판을 하고 있는데요. 민변이 두 차례 변론 요청을 했지만 거부당했습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동조했고요. 5조4천700억원이 걸려 있습니다. 절대로 져서는 안 되는 재판입니다.”

박원석 정의당 정책위의장은 “론스타 사건에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눈에 보이는 혹은 보이지 않는 정치적 힘이 작용했다”며 “ISD에서 승소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론스타가 산업자본인 탓에 처음부터 은행을 인수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입증하면 되는데 정부가 나서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진용 노조 KEB하나은행지부 공동위원장은 론스타 관련 재판을 지켜본 소감을 밝혔다. 대법원은 2010년 10월 외환은행 매각승인 책임자였던 변양호 전 재정경제부 금융정책국장의 무죄를 확정했다.

이진용 공동위원장은 "헐값 매각이 아닌 불법 매각에 대한 판단을 해야 했고, 론스타를 기소해야 했다"며 "판결문을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잘못했다’고 쓰여 있지만 결국 배임이 아닌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아니다' 식의 판결이 내려졌다"고 비판했다.

단체관람을 주최한 단체들과 정의당은 21일 오전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참가자들은 “론스타는 현재까지 국내 금융질서에 반하는 행위를 지속하고 있음에도 론스타와 대한민국 정부의 불법행위에 대해 진상규명도 책임자 처벌도 어느 것 하나 이뤄진 게 없다”며 “매국적인 공모 의혹에 대한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자를 처벌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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