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노사관계컨설턴트

국제노동기구(ILO) 출범 100주년 기념총회 직후인 지난 7월5일 베트남 정부는 ILO 협약 98호를 비준했다. 이로써 8개 기본협약(Fundamental Conventions) 가운데 6개를 비준하게 됐다. 베트남에서 98호 협약은 1년 후인 2020년 7월5일 법적 효력을 갖게 된다.

“조직할 권리와 단체교섭(Right to Organise and Collective Bargaining)”이라는 제목을 가진 98호 협약은 노동자들에게 단체교섭을 제대로 보장하기 위해서는 사용자가 노동자단체를 지배하고 통제하려는 반노조 차별행위(anti-union discrimination), 즉 부당노동행위를 하면 안 된다는 내용으로 이뤄져 있다.

노동자를 위해 노동법을 연구하기보다 자신의 입신양명을 위해 노동법을 연구하는 대한민국의 노동법 학자들이 주장하는 ‘선 입법 후 비준’을 표방하는 대표적인 나라가 베트남이다. ILO의 기술적 지원을 받아 베트남 정부가 법 개정안을 만들고 이를 베트남 국회가 논의해 필요한 법률적 절차를 거치고 내용을 마련한 후 98호 협약을 비준한 것이다.

베트남 정부는 2023년까지 노사 단체의 결사의 자유를 명시한 협약 87호와 정치적 사상범의 처벌을 금지한 협약 105호를 비준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작동하지도 않는 경제사회노동위원회에 기본협약 비준 문제를 맡겨 놓은 채 극우정당 탓만 하면서 정부가 질 책임과 의무를 비겁하게 회피한 대한민국 정부보다 내실 있는 행보를 한 것이다. 더군다나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촛불’ 정부가 정치사상의 자유에 관한 협약인 105호 비준을 거부하고 있다.

내년 총선에서 여당이 승리하면 입법을 통해 기본협약을 비준할 것이라는 생각은 순진하다. 장담하건대 지금과 같은 어정쩡한 정부의 태도와 자세로는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이 압승하더라도 노동권 개선을 위한 유의미한 법 개정은 물론이거니와 기본협약 비준도 불가능할 것임은 명약관화하다.

선 입법 후 비준 같은 법률만능주의 사고를 계속 유지한다면 문재인 정권은 1991년 대한민국이 ILO에 가입한 이후 최초로 (기본협약 비준은 고사하고) 단 1개의 기술협약(Technical Conventions)도 비준하지 못한 무능한 정권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노동자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본가들의 지배권(경영권과 인사권)을 유지하기 위해 노동법을 연구하는 대한민국 노동법 학자들의 착각과는 달리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필리핀 같은 개발도상국으로 갈수록 노동법은 세밀하고 촘촘하기 그지없다. 노동자들이 옴짝달싹 못 하도록 법률에 더해 시행령과 시행규칙과 각종 행정해석으로 전방위적으로 옭아맨다.

아시아의 많은 나라에서 자세하고 복잡하기 그지없는 수준으로 대단히 발달한 법령 체계에 기생충처럼 달라붙은 법대 교수와 판검사와 변호사 등의 법률가계급은 노동자들의 권익을 침해하는 법률이론과 논리를 개발하고 유지함으로써 ‘상류층’의 지위를 이어 가고 있다. 필리핀에서는 변호사들이 노동운동 지도부가 되는 방식으로 노동자단체에 빨대를 꽂아 놓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보다 훨씬 강력하게 선 입법 후 비준 입장을 견지했던 베트남 정부가 ILO 기본협약 비준을 가속화하는 배경에는 글로벌 경제의 파고를 타고 넘으려는 베트남공산당의 정치적 의지가 자리 잡고 있다. 권력 핵심부가 기본협약 비준이 법률적 정합성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결단의 문제라는 인식을 갖지 못한다면 문재인 정권하에서 국제노동기준에 맞는 제도개선을 기대하는 것은 우물에서 숭늉 찾는 꼴이 될 것이다.

ILO가 만든 국제노동법인 190개 협약 중에서 베트남은 24개, 중국은 26개, 한국은 29개를 비준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가 지금처럼 우물쭈물한다면 조만간 기본협약은 물론 전체 협약 비준 개수에서 베트남과 중국에 따라잡힐 것이다. 기본협약 2개를 포함해 전체적으로 14개만 비준한 미국이 있지 않느냐고 자위할 이들이 있을지 모른다. 미국의 꽁무니 뒤에만 있으면 된다고 착각하는 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글로벌 정세가 급격하게 변화하면서 미국의 시대는 저물어 가고 아시아의 시대가 이미 시작됐다는 사실이다.

이제 미국은 유엔 기구가 만든 국제노동기준에서도 후진국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낡고 낡은 군사동맹처럼 노동기준에서의 한미동맹도 시대 변화를 읽지 못하고 퇴행하고 있다. 17세기 청나라의 발흥에 애써 눈감고 망해 가는 명나라에 기댄 조선왕조의 노론은 나라를 말아먹었다. 분명한 점은 군사동맹에 더해 노동기준에서도 현 정권은 점점 ‘노론’의 낡은 길로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저런 눈치를 보며 제 발목을 제가 잡고 있는 문재인 정권의 소심한 행보 때문에 남북관계처럼 노동개혁에도 먹구름이 짙게 끼고 있다.

아시아노사관계컨설턴트 (webmaster@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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