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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의 날실과 씨실의 민주주의
▲ 박제성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이른바 “거버넌스”라는 말의 범람은 기업의 논리가 국가와 사회로 전파되는 현상과 동전의 양면이다. 국가가 하나의 규범체제이듯이, 기업도 하나의 규범체제다. 규범체제이긴 하되, 법이 아닌 규범체제라고 할 수 있다. 비법적 규범체제로서의 기업은 법 없는 통치를 가능하게 하고자 한다. 기업이 국가의 도그마적 몽타주를 자기 것으로 삼으려고 하는 책략은 서양의 국가가 로마-가톨릭 교회의 자리를 차지할 때와 마찬가지로 신화적인 것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피에르 뮈소는 국가와 기업이 동일한 기원을 갖고 있으며 동일한 제도적 매트릭스에서 비롯된다고 지적한다. 로마-가톨릭 교회가 그것이다. 12~13세기 이래 서양이 구축한 모든 제도적 장식은 세 개의 기둥 위에 서 있다. 교회·국가·기업이 그것이다. 이 셋 사이에 존재하는 긴밀한 관계에 대한 분석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이 셋을 각각의 독립된 영역에 할당했기 때문이다. 교회는 종교에, 국가는 정치에, 기업은 경제에 할당됐다. 이 세 영역은 엄격하게 분리됐다. 그러나 이러한 분리 관점은 극복돼야 한다. 이 세 기둥이 상호 간에 형성해 온 관계들의 변화, 특히 수많은 혁명의 과정에서 수정되고 개편돼 온 관계의 변화를 이해하려면.

교회의 품에서 태어난 국가, 이 “교회국가”는 점차 교회와 신학에 맞서 자립을 추구했다. 그 결과 16~17세기에 이르러 절대군주제의 등장으로 승리를 구가했고, 18세기 중반부터는 조금씩 자기제한의 과정을 시작했다. 이렇게 국가가 교회에 맞서 세속화의 투쟁을 전개하는 동안 기업은 끊임없이 다양한 변형을 겪었다. 1750년 무렵부터 국가주의에 대한 비판이 확대되고, 시민사회와 경제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자제해야 한다는 주장이 득세했다면, 그것은 이미 국가가 교회에 맞서 강력한 주권자로서 자립했기 때문이다.

산업혁명 이후 발전한 대기업은 점차 자신의 권력을 내세우면서 국가의 제도와 경쟁하기 시작한다. 산업주의는 자유주의적 형식이든, 사회주의적 형식이든, 아니면 또 다른 어떤 형식이든지 간에 국가와 정치에 대한 비판 위에 터를 잡는다. 시민사회 또는 시장이 원하는 자기규율의 이름으로.

오늘날에는 기업과 국가 간에 헤게모니의 이전이 진행되고 있다. 이 둘은 하나로 용해돼 “기업국가”로 거듭나고 있다. 예전에 교회국가의 퓨전이 일어났던 것과 마찬가지로. 기업국가의 등장은 정치의 분열을 의미한다. 베를루스코니·트럼프·마크롱 이 세 인물은 이러한 제도적 하이브리드가 만들어 낸 결과물이자 동시에 그것을 무대에서 재현하는 연기자들이다. 탈상징화된 국가는 탈정치화돼 기술합리적 경영 속으로 납작하게 축소된다. 반면 기업은 정치화돼 활동 범위를 확장하고 기업 고유의 규범성을 사회 전체로 확대한다. 우리는 지금 진정한 의미에서 지적·정치적 융합을 경험하고 있다.

노동자를 “자본”으로 계산하는 냉철한 합리성으로 무장한 기업이 사회를 통치하는 원리는 비합리적이고 신화적인 주술과 의례에 기반한다. 그러므로 기업의 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화가 실제에 대해 행사하는 힘을 이해해야 한다. 모든 규범체제와 마찬가지로 기업은 도그마의 구체적 표현 양식, 즉 깃발·휘장·로고·음악·춤 같은 엠블럼의 연출을 필요로 한다. 피에르 르장드르는 “텍스트는 신화적 본성으로 인해 의례적으로만 기능한다”고 말한다. 가수 송창식이 고래가 “신화처럼” 숨을 쉰다고 노래한 것은, 고래는 숨을 쉴 때 뿜어내는 분수 같은 물줄기를 통해서만 상징적으로 존재를 과시할 뿐 제 모습을 온전히 드러내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기업이라는 텍스트의 신화적 본성이 엠블럼을 통해 연출된 것, 기업 이미지광고를 통해서 끊임없이 재현되는 것, 그것이 곧 CI(Corporate Identity), “기업의 정체성”이다. 기업의 정체성은 “기업문화”를 드러낸다. 이것은 숭배하는 것이다. 기업문화는 기업숭배다. 문화(culture)와 숭배(cult)는 어원이 같기 때문이다. 기업은 이처럼 스스로 종교가, 대문자로서의 텍스트가 되고자 한다. 그러나 이의제기를 허용하지 않는 텍스트, 다른 해석을 허용하지 않는 텍스트는 원리주의에 빠진다. 씨실 없는 날실은 제멋대로 휘날리는 법이다. 기업, 대문자로서의 매니지먼트, 즉 경영(經營)은 날실(經)만 있고 씨실(緯)은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래서 경영이라는 날실에 씨실이라는 민주주의를 짜 넣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jeseongpark@kli.re.kr)

박제성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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