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민애 변호사(법무법인 율립)

며칠 전 퇴근길에 정기 가스안전점검 안내 문자메시지가 왔다. 부재중이어서 점검을 하지 못했다는 말과 함께 메시지는 이렇게 마무리됐다. “업무시간만 통화 가능합니다. 09시~18시.”

이미 저녁 9시가 다 된 시간이어서 전화를 할 수도 없고, 언제 점검을 받아야 할지 고민하던 찰나 현관문 밖에서 옆집에 가스점검 왔다는 목소리가 들렸다. 순간 업무시간 안내 문자메시지는 까맣게 잊은 채 바로 달려 나가 옆집 점검을 마치고 나오기를 기다렸다. 눈이 마주치자, 저희 집도 해 주실 수 있냐고 묻기도 전에 “○○○호시죠? 댁에 안 계시던데 지금 해 드릴게요” 하며 집으로 같이 들어갔다.

집 안으로 들어가 가스계량기가 있는 곳까지 가면서, 불현듯 안내 문자메시지가 생각났다. 휴대전화기를 만지작거리면서 문자메시지를 확인해 보려 하자 그가 선수를 쳤다. “문자에 6시까지라고 돼 있죠? 본사에서 그렇게 하라고 해요. 저희도 그러면 얼마나 좋겠어요.” 다정하게 웃으면서 건네는 말이 가슴에 콕 박혔다.

지난달 31일 공공운수노조 서울지역공공서비스지부가 서울시와 도시가스사에 검침원의 안전한 업무환경을 위한 대책마련과 불합리한 점검제도 폐지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모든 가스 사용자들은 1년에 한 번 이상 안전점검을 받아야 하는데, 세 번 이상 집에 없거나 본인이 거부하면 점검을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집집마다 다니면서 점검을 해야 하고 검침원 1인당 할당된 세대수를 채우지 못하면 급여가 깎이기 때문에 사실상 할당받은 모든 세대를 점검해야 하는 구조다. 대부분 검침원이 여성인데, 검침원 1인이 방문하다 보니 고객에게 욕을 듣거나 성희롱·성추행을 당해도 대응할 방법이 없다. 술에 취해 있던 고객이 가스점검 왔다는 소리를 듣고 시끄럽다며 욕설을 퍼붓거나, 갑자기 다가와 성추행을 해도 속수무책이다. 지난 5월에는 울산지역에서 성폭력을 당한 검침원이 자살시도를 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정확한 실태조사와 2인1조 근무 등 보호대책마련을 요구하는 이유다.

따뜻한 미소로 인사를 건네며 집을 나서던 검침원 노동자의 얼굴이 생각났다. 고객에게 안내하는 근무시간은 8시간이지만 끝나는 시간을 알 수 없고, 할당된 세대를 채워야만 한다. 늦은 저녁시간 방문도 감수해야 한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낯선 구조의 집에, 누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다. 무슨 일이 벌어져도 쉽게 집 밖으로 나가거나 연락을 취하기 어렵고, 내 손에 쥐어진 것은 호신용 가스 스프레이가 전부다. 가스안전 상태를 점검해서 일상생활의 안전을 책임지는 노동자들이 정작 자신의 안전은 보장받지 못하고, 온갖 위험은 오롯이 노동자들 몫으로 전가되고 있는 것이다.

이윤과 비용 논리에 감춰지는 위험이 노동자들의 일상을, 삶을 흔들고 있다. 노동자의 안전이 보장될 때 그 업무에 따른 안전이 보장될 수 있다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 지켜지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 큰 욕심일까. 매 순간 일상적인 위험에 노출되는 노동자들의 절규에 조금이라도 귀를 기울이고 지금이라도 실질적인 안전대책을 마련할 것을 감히 바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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