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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과 집시의 도시, 그라나다
▲ 최재훈 여행작가

지브롤터 해협을 두고 북아프리카와 맞닿아 있는 스페인은 한동안(한동안이라고 하기에는 꽤 오랫동안) 이슬람 세력의 지배를 받은 역사를 품고 있는 나라다. 그것도 무려 800년 가까이 말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늦게까지 이슬람 세력이 버티고 머물렀던 도시가 바로 그라나다이다. 1492년 콜럼버스의 후원자이기도 했던 이사벨 여왕이 그라나다의 이슬람 지배자들에게 정권을 넘겨받으면서 스페인에서 이슬람 세력의 지배는 끝이 나게 된다. 그라나다 하면 무조건 반사처럼 떠올리게 되는 알람브라(알함브라로 알려진) 궁전은 800년 가까이 이어졌던 이슬람 문화의 깊은 뿌리를 지금까지도 보여 주는 산 증거이기도 하다. 그러니 그라나다를 찾은 여행자라면 열일 제쳐 두고 알람브라 궁전을 찾게 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워낙 랜드마크로 찍혀 있다 보니 궁전을 가 보지 않고 어디 가서 그라나다에 다녀왔다는 소리를 하기는 힘들다. 그래서 입장료가 2만원 가까이 하고, 관람시간이 반나절은 잡아먹는다 해도 여행객들은 알람브라 궁전으로 흘러들어 가게 돼 있다.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이라는 기타 선율로 더 잘 알려진 이 궁전은 아랍인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으니까 당연히 이슬람 양식이 기본이다. 벽면 곳곳을 채운 타일 장식과 아랍어와 코란을 연상시키는 섬세한 문양들은 척 봐도 아랍식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이슬람 특유의 맑은 파란색 타일은 언제 봐도 상큼하다. 알람브라 궁전에서 가장 인상적인 곳은 나스르 궁전의 정원과 물길이다. 정원 중에서는 밖에서는 보이지 않아 마치 비밀의 정원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는 안뜰이 가장 인상에 남는다. 내게는 무엇보다 궁 전체를 흐르는 수로가 가장 눈에 띄었다. 지금도 맑은 물이 흐르는 수로는 어느새 연못이 됐다가 분수가 되기도 하고, 열두 마리 사자들로 만들어진 물시계가 되기도 한다. 물이 마치 혈액처럼 온 궁전을 흐르며 알람브라를 죽은 듯 차가운 대리석 유적지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나스르 왕궁을 빠져나올 즈음에서야 이 물줄기의 근원처럼 보이는 샘물과 만나게 된다.

알람브라 궁전 꼭대기에 올라 그라나다 시내 쪽으로 눈길을 돌리면 맞은편에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언덕 동네 두 곳이 눈에 들어온다. 그중에서 직접 찾아가 본 곳은 집시들의 터전이라는 사크로몬테였다. 알람브라 궁전을 남동쪽으로 마주한 언덕에 집시들이 수백 년 동안 모여 살았다는 사크로몬테는 석회질의 언덕을 파고들어 가서 만든 동굴집들이 유명하다. 집시들이 그라나다의 언덕 하나를 차지하고 살게 된 것은 그라나다 이슬람 세력의 흥망성쇠와 연결돼 있다. 주워들은 얘기로는 그라나다가 이슬람의 손에서 이사벨 여왕에게로 넘어갈 때 집시들이 제법 큰 전공을 올렸다고 한다. 그 공을 인정받아 떠돌이 취급을 받던 집시들은 그라나다의 언덕 한 귀퉁이를 얻어 지낼 수 있게 되긴 했는데, 그 얻어 낸 땅이 그리 살기 좋은 곳은 아니었다. 아마도 이사벨 여왕이 ‘옜다 먹어라’ 하는 심정으로 마뜩잖게 땅을 떼어 준 모양이었다. 하지만 집시들은 정착할 수 있는 땅을 얻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던지 척박한 돌산을 파고들어 가 동굴집을 짓고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집시들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500년 넘는 세월을 버티며 동굴 속에서 기타를 치고, 플라멩코를 추며 삶을 이어 왔다.

세비야에서 바람 맞은 플라멩코 공연을 이곳 동굴에서 볼 수 있었다. 동굴 플라멩코는 그 분위기가 아주 독특하다. 세로로 20여미터 길게 파고들어 간 동굴 벽쪽으로 관객과 연주자가 바짝 붙어 앉는다. 기타 한 대와 손북 치는 연주자 한 명, 그리고 박수로 리듬을 맞춰 가는 가수가 음악을 만들고 여러 명의 남녀 무희들이 동굴을 앞뒤로 오가며 플라멩코를 춘다. 춤 솜씨를 평가할 능력은 없지만, 분위기는 더할 나위가 없다.

알람브라 궁전에서 보이는 또 다른 언덕 동네는 알바이신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집시들의 언덕인 사크로몬테 바로 왼편에 구시가지처럼 자리 잡은 이 언덕 동네는 다름 아닌 아랍인들의 거리였다. 이슬람 왕국이 무너지면서 지배층들은 지브롤터 해협을 도망치듯 건너갔지만, 이곳에 뿌리박고 있던 수많은 무슬림들은 종교를 바꿔 가면서까지 그라나다에 남았다고 하는데, 그 후손들이 살고 있는 곳이 바로 알바이신 지구였다. 따지고 보면 집시와 무슬림이라는 수백 년 전 원수들이 길 하나 사이에 두고 살고 있는 모양새지만, 별다른 충돌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무슬림이든 집시든, 그 후예들은 살던 버릇대로 구역을 나눠 살고 있을 뿐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500년 넘게 이 땅에서 살아 온 원주민이고 이웃동네 주민이나 다름없을 테니 어쩌면 별일 없이 사는 게 당연한 일일 테다.

그라나다를 끝으로 스페인 남부 여행을 이렇게 마무리 짓고, 이제 스페인 여행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인 바르셀로나로 가기 위해 야간침대열차가 기다리고 있는 기차역으로 향했다.

여행작가 (ecocjh@naver.com)

최재훈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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