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정수 직업환경의학전문의(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지난해 12월 수천 명의 노동자가 일하는 공장 식당에서 조리업무를 하다가 허리통증과 다리 저림 증상이 발생해 필자가 근무하는 병원에서 산업재해를 신청한 노동자가 있었다. 필자의 소견상 추간판탈출증을 진단하는 데 별 무리가 없어 보였고 업무관련성도 높아 보였다. 근로복지공단 지사에서는 공단 안산병원으로 업무관련성 특진을 보냈다. 조리·건설 등 5대 업종에 대해 시범사업 중인 근골격계질환 업무관련성 특진이 많이 지체되고 있다고 해서 조금 걱정스럽기는 했으나 시범사업 자체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가 많아 환자를 안심시키고 기다려 보자고 했다.<2019년 1월24일자 칼럼 “업무관련성 평가 특진, 신뢰성만큼 신속성도 중요” 참조>

올해 8월 말쯤 결과가 나왔다. 무려 8개월 만이다. 예상보다 훨씬 오래 걸렸다. 그런데 결과는 불승인이었다. 8개월을 기다리는 것도 힘들었는데 불승인이라는 예상치 못한 결과를 통보받은 환자는 억울한 마음에 정보공개청구 신청을 했다. 관련 서류를 전달받아 검토해 보니 어이가 없었다.

“허리에 부담이 되는 업무를 반복적으로 수행해 허리 부위에 누적된 신체 부담은 높은 것으로 판단되나, MRI 등 영상의학 자료상 신청 상병이 명확하게 확인되지 않고, 수행 업무와의 관련성이 낮은 기존 개인 질환으로 판단된다는 의학적 소견에 따라 신청 상병과 업무와의 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되지 아니한다”는 것이 불승인 사유였다. 실제로 추간판탈출증은 산재심사 과정에서 신청 상병이 명확하게 확인되지 않아 불승인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문제는 이분이 근로복지공단 안산병원에서 특진을 받았고, 특진 결과 업무관련성이 높다는 소견이 있었음에도 경인지역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에서 이 소견을 무시하고 불승인 판정을 했다는 것이다. 근로복지공단 소속기관인 경인지역 업무상질병판정위가 같은 공단 소속기관인 안산병원의 특진 소견을 무시한 것이다. 이럴 거면 업무관련성 특진을 왜 보냈나?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업무상질병판정위에서 개최하는 심의회의가 어떻게 구성되고, 실제로 업무상질병 판정이 어떤 식으로 이뤄지는지 들여다보면 알 수 있다. 필자가 다년간 업무상질병판정위에 참여해 본 경험에 따르면 이런 일이 벌어진 이유는 업무상질병판정위 심의회의에 참여하는 임상의가 신청 상병의 의학적 확인 여부에 대한 판단을 독점하기 때문이다.

업무상질병판정위 심의회의는 위원장을 포함해 7명으로 구성한다. 회의는 구성위원 과반수(4명 이상) 출석과 출석위원 과반수 찬성으로 의결한다. 심의위원은 (임상)전문의와 직업환경의학과 전문의를 각각 2명 이상 지정하고 그 외 변호사·노무사 등이 참여한다. 심의위원들은 신청 상병이 의학적으로 명확하게 확인되는지와 신청 상병과 업무와의 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되는지 두 가지에 대해 판단해야 하는데, 대개 신청 상병이 의학적으로 확인되는지에 대한 임상의 소견을 듣고 난 후 신청 상병과 업무와의 상당인관관계에 대한 토론을 한다. 만약 임상의가 신청 상병이 의학적으로 명확하게 확인되지 않는다고 하면 상당인과관계에 대해서는 아예 토론조차 하지 않고 불승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의학적으로 확인되지 않은 상병에 대한 상당인과관계는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상당인과관계에 대해서는 모든 참가자들이 비교적 자유롭게 토론하는 반면 신청 상병이 의학적으로 확인되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전적으로 임상의 판단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의사가 아닌 심의위원은 상병에 대한 소견을 제시할 수 없고, 전공이 다른 직업환경의학과 전문의가 임상의 소견에 이의를 달기 어렵다. 임상의 개인의 판단이 심의위원 전체의 판단으로 포장되는 것이다. 이번 사례에서 해당 노동자의 경우 특진은 근로복지공단 안산병원 직업환경의학과와 신경외과에서 다학제로 진행했고 환자가 제출한 영상에 대한 영상의학과의 소견도 참고했다. 수개월에 걸쳐 여러 명의 의사들이 여러 자료를 검토하고 환자를 직접 진찰해 판단한 결과를 업무상질병판정위가 환자를 직접 진찰하지도 않고 기껏해야 몇 분 정도 서류를 검토했을 임상의 판단에 의존해 순식간에 뒤집은 것이다.

과거부터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게 있었다. 노동계와 시민·사회단체가 지속적으로 심의회의에서 임상의를 제외해야 한다고 요구했지만 아직까지 수용되지 않고 있다. 심의 전체 과정에서 임상의를 배제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신청 상병의 의학적 확인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중요한 부분 중 하나다. 이 과정에서 임상의의 역할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 판단은 심의회의에서가 아니라 그 이전에 이뤄져야 한다. 심의회의에 올라오는 안건들은 대개 수개월간의 조사 과정을 거쳐서 올라오는데 임상의 한마디에 업무관련성에 대해서는 아예 토론조차 이뤄지지 않는 것은 행정력 낭비다. 이런 상황에서는 업무상질병 특진 시범도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다. 또한 의학적 소견이라는 것은 전문가에 따라 다를 수 있으므로 여러 전문가들의 중론을 모을 수 있는 위원회 구조가 필요하다. 현재 임상의 위주로 이뤄지는 소위원회를 보다 공식화하는 것이 하나의 방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근로복지공단은 업무상질병 심의 과정에서 임상의가 본연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심의회의에서 제외하고 임상의 소견은 심의회의 이전에 충분히 반영될 수 있도록 제도를 보완해야 한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