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제성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전통적인 법인사업 모델에서 노동 3권은 법인의 정체성이 뚜렷한 만큼이나 견고하고 뚜렷한 작동 원리를 갖는다. 이 작동 원리는 ‘깃발’로 상징된다. 이것은 조직화된 채널을 통해 의사를 결집하고 표명하는 운동 방식이다. 집단적 정체성을 공유하는 노동자들은 깃발 아래 집결해 일사불란하게 주장을 관철해 나간다. 전통적인 아날로그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에서 깃발은 강력한 메신저 역할을 수행한다. 깃발 아래 결집한 집단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드높인다.

반면 현대의 디지털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에서는 각각의 개인이 스스로 메신저 역할을 수행한다. 이것은 ‘촛불’로 상징된다. 촛불은 깃발이 주도하고 동원하는 운동이 아니라, 개인들이 사회연결망을 통해 정보를 공유하고 확산하는 과정을 거쳐 형성되고 퍼져 나가는 운동이다. 이제 촛불은 21세기 디지털 시대의 운동 양식이 됐다.

노동 3권은 깃발의 상징과 촛불의 상징을 과도기적으로 경험하고 있다. 촛불은 깃발에 ‘의한’ 운동이 아니라 깃발과 ‘함께하는’ 운동이며, ‘조직에’ 가입하는 운동이 아니라 ‘주장에’ 가입·동조하는 운동이다. 촛불은 이합집산을 반복하며 개방성과 유연성을 속성으로 한다. 촛불은 대표와 길항한다.

그러나 집단은 대표의 장치를 경유하지 않고서는 법 주체로 재현되지 않는다. 대표의 원리는 사실상의 존재에 머물고 있는 어떤 집단을 법의 무대에서 법률행위를 할 수 있는 법적 주체로 연출한다. 대표되기 이전의 집단은 개인들의 군집에 불과한 사실적 존재에 그친다. 그 상태로서는 어떤 법률행위를 할 수 있는 법 주체가 아니다.

그렇다면 촛불은 대표의 효과를 빌리지 않고 직접 군중을 법 주체로 재현하는 새로운 원리인가? 아니면 그저 대표를 거부하는 수준에 그치는 것인가?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촛불은 하나의 사회적 현상으로 우리 앞에 존재한다는 점이다.

노동 3권은 이 현상에 조응하는 방향으로 재해석돼야 한다. 단결권은 명사로서의 조직을 결성하거나 조직에 가입하는 권리로 좁게 해석할 이유가 없다. 동사로서의 조직에 가입하는 것, 즉 다시 말하면 주장에 가입하는 것도 단결권의 이름으로 보장돼야 한다. 주장에 가입한다는 것은 주장의 성격과 내용에 따라 지지와 동참 여부를 선택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어떤 때에는 갑의 주장을 지지하고, 어떤 때에는 을의 주장을 지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주장에 가입한다는 것은 그 주장을 지지하고 그 주장의 관철을 위해 행동을 함께한다는 의미다.

단결권을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면, 단체교섭권과 단체행동권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조합만 단체교섭권을 갖고 단체행동을 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스스로 지지하는 주장에 힘을 싣기 위해서 단체행동에 나서는 것도 단체교섭권과 단체행동권의 이름으로 보장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해석하면 “근로자는 근로조건의 향상을 위해 자주적인 단결권, 단체교섭권 그리고 단체행동권을 가진다”고 규정한 헌법 33조1항의 주어가 노동조합이 아니라 “근로자”인 이유가 좀 더 잘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노동 3권을 ‘집단적 자유권’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즉 권리의 향유 주체는 노동자 개인이면서, 권리의 행사 방식은 집단적인 성격을 갖는 자유권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할 때 노동기본권은 단순히 사용자의 업무를 방해하는 행위가 아니라, 노동조건과 직업규범의 결정 과정에 노동자들의 집단적 의사가 개입하고 참여하는 것을 보장하는 권리 또는 자유로 재인식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하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쟁의권’으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쟁의(爭議)는 다투어(爭) 논한다(議)는 뜻이다. 그리고 논한다(議)는 것은 말(言)로써 정의(義)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쟁의는 기본적으로 평화의 개념이다. 쟁의는 의제를 설정하고 규범을 창출해 나간다는 정치적 관점을 반영한다. 쟁의 개념은 노동자들이 단체협약이든 노동관계법이든 직업규범의 심의와 제정 과정에 참여하는 것을 긍정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노동에서의 민주주의”를 실현한다는 의미가 있다. 그것이 민주주의에 관한 것인 한 그러므로 당연하게도 최대한 넓게 보장될 필요가 있다.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jeseongpark@kli.r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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