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훈 기자
높다란 빌딩 주변 잘 관리된 잔디밭 곳곳에 솟은 스피커에서 옛 노래가 흘러나왔다. 새마을운동 시절 노래 같다고 누군가 평했다. 그 노래 1절 끝 즈음에 “우리 도로공사” 하는 가사가 나왔는데, 가만 귀 기울여 듣던 사람들, 그 노래 1절 끝 무렵 “우리 도로공사” 하는 부분에서 화들짝 놀라고 만다. 입에서 험한 말이 왈칵 쏟아졌다. 욕 비슷한 것이었다. 이들은 곧 고쳐 말했다. 사가(회사 노래)네. 우리 노래네. 직원이니까 알고 있으라고 틀어 준 거네. 활기찬 농담엔 매번 뼈가 들었다. 농성이 이미 길었다. 말이 자주 격했다. 이 싸움 하면서 욕을 배웠다고 했다. 발목 감싼 녹색의 석고붕대엔 ‘조사뿐다’ 같은 욕을 새겼다. ‘직고 출근’이라고 그 아래 적었다. 각도를 보아하니 깁스 주인의 낙서는 아니었지만 그 마음 다를 리 없었다. 주워 온 종이상자에도, 붕대 위에도 낙서처럼 요구와 바람을 빼곡히 적었다. 언젠가 이강래 사장의 집 앞에서 시위하다 넘어져 다쳤다. 10주 진단을 받았다. 그 다리를 해 갖고 어딜 가냐고, 민폐라고 다 큰 아들이 말렸다. 어느 날 말없이 가방 꾸려 기차를 탔다. 아비규환 점거농성장 밖 회전문 앞을 지켰다. 그 안쪽 농성하는 동료를 걱정했다. 뭐라도 해야지 싶었다. 노조, 투쟁 이런 거 잘 몰랐단다. 그저 열심히 살 줄만을 알았다. 말없이 선전물 붙이던 조합원은 도대체 쉴 줄을 몰라 끊임없이 뭔가를 했다. 몸에 밴 일이었다. “이거라도 할 수 있으니 다행”이라고 말했다. 혼자였으면 엄두를 못 낼 일이었다. 똘똘 뭉치니까 즐겁다고 웃었다. 그 다리를 해서 절뚝절뚝 자꾸 어딜 다닌다. 많이 배우진 못해 꼼수 그런 건 잘 모른다고 했다. 공부 많이 해서 저 높은 자리 올라 꼼수와 거짓말을 일삼는다면 그게 잘사는 거냐고 아들에게 말했다. 신발 끈을 조인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