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용균 사망사고 진상규명과 재발방지를 위한 석탄화력발전소 특별노동안전조사위원회(김용균 특조위)가 지난달 19일 4개월에 걸친 진상조사를 마치고 715쪽 분량의 조사결과 보고서를 내놓았다. 조사위원 16명, 자문위원 30여명이 참여한 대대적인 진상조사 결과다. 한국 사회가 김용균씨 죽음에 공명한 이유는 안전을 비용으로 보고 죽음까지 외주화하는 부조리 때문이었다. 김용균 특조위가 전력산업 구조개편 역사를 들춰내고 시정을 권고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결과보고서를 자세히 들여다봐야 어떻게 바꿀지 방향을 제대로 잡을 수 있다. 조사위원과 자문위원이 직접 진상조사 결과보고서의 의미를 담은 글을 보내왔다. 7회에 걸쳐 싣는다.<편집자>
 

▲ 전주희 김용균 특조위원(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노동시간센터 연구원)

데이비드 와일은 <균열일터>에서 전 세계적으로 문제가 되는 노동의 분할과 외주화로 균열된 일터의 문제를 다룬다. 그는 미국의 저명한 도시학자인 제인 제이컵스를 인용하며 균열된 일터에서 법·제도적 조치란 무엇인지를 되묻는다. 제이컵스는 “낙후한 도시 일부 지역에서 거리의 법과 질서는 거의 전적으로 경찰과 특수헌병대에 맡겨져 있다. 그러한 동네는 말 그대로 정글이다. 정상적이고 인과관계가 분명한 법 시행 체계가 무너진 곳에서는 아무리 많은 경찰력이 동원된다 해도 문명화를 기대할 수 없다”고 말한다. 안전한 거리는 경찰이 수시로 순찰하고, CCTV가 그물망처럼 얽혀 있는 곳이 아니다. 치안을 강화한다고 해서 안전이 강화되지는 않는다. 누구가가 위험에 처했을 때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 위험을 해결하는 것, 오직 그러한 집단적인 권리행사만이 안전한 거리를 확보할 수 있다. 거리뿐이랴. 안전한 현장을 위해 노동자 참여 조건을 만드는 것, 법은 그렇게 작동하고 있는가?

김용균 특조위가 지난 5개월 동안 목격한 것은 비상식적이고 비윤리적인 노동조건과 고용주의 전횡이었다. 조사를 진행할수록 고민도 깊어졌다. 이유는 이 열악한 현장이 남도의 어느 외딴 섬 염전이 아니라 정부의 관리·감독이 집중되는 공기업이기 때문이다.

매우 정교한 공기업 경영평가는 외주화를 규제하지 않았다. 오히려 경영 효율성을 숫자로 줄 세우며, 공공부문의 인력을 통제하며 외주화의 길을 열었다. 그 결과 발전소에서 중대재해는 끊이지 않았다. 하청노동자가 사망할 때마다 정부의 규제는 강화됐고, 안전을 위한 발전소 시설 투자는 ‘핵심설비’를 중심으로 이뤄졌다. 중대재해 사고가 발생할수록, 안전에 대한 강조가 강화될수록 정규직이 일하는 ‘핵심설비’와 하청노동자가 일하는 ‘비핵심설비’ 간의 설비 격차가 벌어졌다. 원청이나 하청업체 고용주들의 목소리도 커졌다. ‘도대체 왜 안전수칙을 지키지 않고 일하느냐’는 질책은 명령과 통제의 언어가 됐다.

김용균 노동자 사망 이후의 발전소는 그야말로 살얼음판이었다. 모두들 안전에 촉각이 곤두서 있었다. 조회 때마다 하청노동자들은 안전구호를 외치며 현장에 나갔다. ‘안전에 대한 경각심’이 드높아진 현장을 설명하는 발전소 관계자들 말에는 힘이 들어갔다. 현장 곳곳에 CCTV를 설치할 계획이고, 하청노동자가 안전수칙을 위반하면 ‘원-아웃제’를 시행할 것이라고도 말했다. 기획재정부는 안전관리 인력 200여명을 충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정부는 발전사를 포함해 중대재해가 발생한 공공부문에 정부 경영평가상 안전지표를 2점에서 10점으로 늘렸다. 중대재해가 발생하면 0점이 돼 버리는 아찔하고도 파격적인 정부 평가지표에서 빠져나온 것은 무엇인가?

안전을 위한 강력한 처벌과 통제는 반드시 필요해 보인다. 하지만 그것에 현장노동자 권리가 빠지는 순간 안전은 치안(police)이 된다. 정부의 경영평가와 공공부문의 인력통제는 외주화의 길을 열며 공기업을 균열일터의 모범사례로 만들었다. 경영평가로 인해 정규직 노동자들조차 산업재해 은폐가 관행으로 정착됐다. 김용균 노동자 사고 이후에도 하청노동자들은 끊임없이 산재신청을 하지 못하도록 여전히 회유와 압력을 받고 있다. 원청인 발전소와 하청업체 간 계약서를 보면 ‘개인과실로 인해 산재가 발생할 경우, 그리고 그것이 발전소 운영에 영향을 미칠 경우’ 벌금과 벌점을 받게 돼 있다. 이것의 이름은 ‘안전계약 특수조건’이다. 안전은 원·하청의 단면을 타고 산재 당사자를 합법적으로 징벌하도록 제도화돼 있다. 이러한 규제들은 위험에 처한 동료에게 우르르 달려가는 집단적인 권리행사를 봉쇄한다. 대신 다친 사람에 대한 비난, 죽은 사람에 대한 낙인, 아픈 사람에 대한 혐오의 문화를 확산한다. 피해자가 가해자로 손쉽게 둔갑하는 사회는 제이컵스의 말처럼 “정상적이고 일상적인 법 시행이 무너져 버린 곳”이다. 이곳에 치안이 강화됐다는 것은 위험에 대한 티핑포인트(급변점)가 여전히 위협처럼 버티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부는 특조위 권고를 최대한 수용할 것이라고 한다. 단 직접고용은 제외하고. 노동자가 실질적으로 위험을 해결할 수 있는 그 출발점인 직접고용은 제외하고 말이다. 정부에 묻는다. 산재에 대한 징벌적 규제와 안전인력의 대규모적인 투입만으로 정말로 안전한 일터가 만들어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가? 부분적인 처우개선과 이름뿐인 자회사 전환이 공정한 노동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노동자들이 현장의 위험을 해결하기 위해 참여할 수 있는 권리의 행사 없이 ‘안전수칙 준수’를 무작정 반복한다고 해서 안전문화가 형성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가?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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