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기덕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1. ‘자유 없이 권리 없다.’ 당신은 내게 ‘무슨 뜬금없는 말이냐’고 물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자못 심각했다. 지난 3일 대법원 노동법실무연구회에서 권오성 성신여대 교수(법학)의 발제에 대해 내가 하고자 했던 토론이었다. 노동자의 자유와 권리를 위한 법을 변함없이 연구해서 발표해 온 학자라서 내가 좋아하는 교수다. 그러니 여기서 하는 내가 하는 비판은 그의 기본입장 내지 결론에 대한 것이 아니다. 단지 그에 이르는 방법에 관한 이견이라 할 수 있겠다. 괜한 오해가 없길 바란다. ‘사내하청업체 노동자가 자신이 근무하는 원청 사업장 내에서 직장점거 쟁의를 할 수 있는가’에 관한 발제였다. 2014년 인천국제공항공사의 특수경비용역업체 소속 노동자들이 벌인 쟁의에 관한 법원 판결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흔한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쟁의였다. 이 나라에서 사내하청업체 소속 노동자들이 사업장 내에서 쟁의를 할 때면 벌어지는 사례였다. 이미 15년 전 현대자동차에서 있었다.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노조를 조직해 원청을 상대로 정규직 전환투쟁을 할 때면, 거기까지는 아니고 그저 하청 사용자를 상대로 임단투를 벌일 때도 사업장 내에서 쟁의를 하면, 으레 원청은 사업장 소유권 등을 내세워 출입을 저지하고 퇴거를 요구했다. 원청이 피해자로 인정돼 건조물침입죄와 퇴거불응죄, 그리고 업무방해죄가 적용돼 수많은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처벌받았다. 여기에 출입금지 및 사업장 내 쟁의금지 가처분까지 빈번했다. 그때마다 나는 법정에서 사내하청 노동자를 사용하는 자는 원청 사용자이니 원청을 상대로 한 쟁의를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이 씨알도 먹히지 않아 사내하청 노동자가 자신이 일하는 사업장 내에서 쟁의하기 위해 출입을 막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판사는 앵무새처럼 공소장 기재대로 유죄를 선고하고, 법원은 가처분 결정을 했다. 징그럽게 판결하고 지겹게 결정했다. 변호사로서 그렇게 당했던 것이니 권 교수의 발제 주제에 내가 관심을 갖는 건 당연했다. 그리고 이날 자유와 권리에 대해 토론했다.

2. 인천국제공항공사는 특수경비 용역업체와 도급계약을 체결했다. 인천공항 내 보안검색 및 순찰 업무 등은 용역업체 소속 노동자들이 수행했다. 그 노동자들이 노조를 조직해서 인천공항 내에서 피켓을 들고 출입문 등에서 서 있는 방법으로 쟁의를 하자 원청 인천국제공항공사가 퇴거를 요구했다. 이에 불응했다가 퇴거불응죄로 기소돼 인천지법에서 유죄판결을 선고받았다. 이런 사실, 이런 쟁의를 두고서 법원은 파견이 아닌 도급계약이라며 원청 인천국제공항공사가 사용사업주에 해당하지 않아 쟁의할 상대방이 아니라고 판단하고서, 노조 간부회의에서 미리 계획해 조합원 80여명이 국가 중요시설인 인천공항 여객터미널과 교통센터 등 여러 장소에 동시에 피켓을 들고 서 있었다는 점을 들어 인천국제공항공사가 그 쟁의를 수인할 한계를 넘었다고 판단했다.

이에 대해 발제자 권오성 교수는 사내하청 노동자는 자신이 일하는 원청 사업장에 체류할 권리가 있다며 퇴거불응죄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법원의 유죄판결을 비판했으니, 나는 당연히 그 결론에 박수를 보냈다. 하지만 사업장 체류 권리를 내세워 사내하청 노동자의 쟁의에 대한 면책으로 나아가기에는 그 권리가 단단하지 못하다고 이날 나는 토론했다. 사업장 내 체류할 권리라는 것은 근로계약에 따라 근로자로서 사용자에게 노무를 제공하기 위해 사업장에 머무는 정도의 권리에 불과하다. 기껏해야 근로계약상 권리다. 사용자의 지휘·명령에 복종해서 일해야 하는 사내하청 노동자는 사용자가 노무수령을 않겠다고 사업장 밖에 나가라고 하면 나가야 하는 ‘근로자’다. 그가 가졌다는 사업장에 체류할 권리로는 이 세상에서 사용자에 맞서지 못한다. 사용자를 배제할 힘 있는 권리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사용자에 복종해야 가지는 권리에 지나지 않는다. 계약에 따라 혹은 사용자 명령에 따라 갖기도 하고 갖지 못하는 권리라면 사용자는 계약으로, 명령으로 박탈하고 제한하면 그만이다. 원청과 하청 사용자 사이의 도급계약, 하청 사용자와 노동자 사이의 근로계약을 통해 실제로 그랬다. 예를 들어 하청노동자의 쟁의 등에 대비해 계약해지 조항을 두는 등으로 사용자들은 대응했다. 권 교수는 사내하청 노동자가 원청 사업장에 체류할 권리가 있으니 거기서 머물며 쟁의할 수 있는 것이라고, 그 쟁의가 직장점거로서 정당성이 인정되면 퇴거불응죄 등으로 처벌할 수 없다는 견해를 발표했다. 사업장에서 체류할 권리를 쟁의 장소와 연결 지어 논리를 전개한 것인데, 앞에서 말한 것처럼 사용자가 그 체류할 권리를 박탈·제한할 경우 그 연결이 문제가 된다. 이 경우는 ‘거기에 권리 없으니 쟁의 없다’고 말할 것인가. 사업장에 체류할 권리가 없게 되면,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사업장 내 쟁의는 퇴거불응죄 등으로 처벌할 수 있다는 것으로 귀결되는 논리에는 나는 반대할 수밖에 없었다. 권리로는 답이 없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자 했다. ‘권리 없어도 쟁의 있다.’

3. 국제노동기구(ILO) 식으로 ‘단결의 자유’, 대한민국헌법상 단결권·단체교섭권·단체행동권 등 노동기본권은 자유를 말한다. 이는 결코 계약상 권리를 기본권으로 보다 강력하게 보장하는 걸 말하지 않는다. 노동자가 단결해서 활동(교섭 및 행동)하는 자유를 기본권으로 선언한 것이다. 본래 자유는 권리가 아니다. 국가권력·자본이 노동자가 단결해서 활동하도록 해 줘야만 행사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니다. 권력과 자본이 민·형사 책임의 부과로 간섭하지 않기만 하면 노동자가 행사할 수 있는 자유가 단결의 자유, 노동기본권인 것이다. 생각해 보면 대단한 자유도 아니다. 특별히 노동자를 위해 보장한 기본권이라고 대단한 헌법전이라고 치켜세울 것도 아니다. 대한민국헌법에서 국민 기본권으로 보장한 결사의 자유, 그것의 노동편이라고 보면 별거 아닌 자유인 것이다.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 다른 사람들과 결사체를 만들어 필요한 활동을 하듯이 노동자도 다른 노동자들과 노조 등 노동단체를 만들어 활동할 수 있는 것이라고 보면 된다. 하지 마라고 금지하지 않으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 자유인 것이다. 다만 결사의 자유만으로도 노동자는 얼마든지 노조 등 단체를 만들어 활동할 수 있는 것인데도, 대한민국헌법이 단결권 등 노동기본권을 33조에서 규정했다는 것은 특별히 노동자에게 결사의 자유보다 더한 자유를 보장했다고 봐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결사의 자유로서 얼마든지 노동자가 노조 등 노동단체를 만들어 활동할 수 있음에도 특별히 노동기본권을 노동자에게 보장했을 테니 말이다. 바로 이러한 노동자의 자유로 봐야 하고, 이렇게 볼 때 비로소 특별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사내하청 노동자가 자신이 일하던 사업장에서의 쟁의는 이런 자유로 봐야 하는 것이지, 사내하청 노동자가 체류할 권리가 있는지로 볼 것은 아니다. 사내하청 노동자가 일하던 사업장에서 직장점거 쟁의를 한 경우 사내하청 노동자가 그 사업장에 체류할 권리가 있는지 여부를 따지지 않고 원청 노동자의 쟁의와 마찬가지로 그 직장점거의 정당성 여부로 들여다봐야 한다고 주장해야 한다. 결국 문제는 자유의 수준 내지 범위인 것이고, 그 노동자의 자유 확장을 위해 싸워야 하는 것이다.

4. 기왕에 자유를 말했으니 좀 더 생각해 보자. 도대체가 자유를 모른다. 오늘 노동자는 자유를 알지 못한다. 그저 시장경제의 나라,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으니 자유라고 알고 있다. 도대체 자신이 어째서 자유라는 것인지는 알지 못한다. 사실, 자유는 없다. 아무리 우겨도 진정한 자유는 없다. 솔직해지자. 단지 시장의 거래를 자유라고 착각하고 있을 뿐이다. 자유를 거래하는 시장을 두고서 자유의 시장이라고 여기고서, 자유만세를 외치고 있다. 인간의 역사에서 여러 가지 세상이 있었다고 배웠다. 주인과 노예의 노예제, 영주와 농노의 봉건제(또는 이에 준하는 취급한 지주와 소작인), 그 밖에 아시아적 생산양식 운운했던 전제군주와 노예인민, 또 이러한 생산양식이 중첩된 세상이 존재했다가 오늘은 마침내 이 자유의 세상에 도달했노라고 배웠다. 그런데 그 노예(농노), 인민이 한 주인(영주)이 아니라 그 총합을 섬겨야 한다면 그래서 그 총합으로서 (납세와 병역 등을 집중한) 권력을 국가체제로 운영하면서 인신예속의 강제를 제거하고 그걸 거창하게 자유 내지 기본권으로 포장할 경우 그래도 자유만세인 걸까. 만세를 외쳐도 그 만세에 대해서는 자유의 만세가 아니라 자유의 굴종이라고 해야 한다. 오늘 노동자는 자유를 모른다. 특히나 이 나라에서 노동자는 그렇다.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 등 노동관계법령은 노동자가 단결해서 교섭 및 쟁의로 활동하는 것을 제한·금지하고 그 위반시에는 징역형 등으로 처벌까지 하고 있다. 그야말로 노동자의 자유 보장은 고사하고 그 자유를 버젓이 법률로 제정해 탄압하는 나라인 것이다. 단순히 일하지 않는 쟁의, 파업조차도 주체·목적·절차·수단과 방법 등 갖가지 제한과 금지로 규제하고 있다. 단결의 자유를 국가 형벌권 등으로 금지하는 나라의 노동자에게 자유를 말할 수 없다.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h7420t@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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