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석호 노동운동가

운동은, 한국 사회의 방향과 전망을 제시해야 한다. 그래야 대중은 운동과 함께 나아갈 것인지 말 것인지 판단한다. 꿈을 세우지 못하는 운동은 미래를 개척할 수 없다. 꿈으로 묶이지 않는 대중은 모였다 흩어지기를 반복하는 모래알일 뿐이다. 그런데도 한국 운동은 계급과 민중, 시민과 국민에게 사회 발전전망을 제시하지 않는다. 운동을 주도하며 운동의 현재를 규정하는, 운동 내 87세대 전반의 뿌리 깊은 개량주의 트라우마가 원인이다. 빙산 위 의식적 트라우마는 전진을 가로막고, 빙산 밑 무의식적 트라우마는 전진을 회피한다.

혁명주의가 아니면서도 개량주의 트라우마를 털지 못하는 현상을 뭐라고 해야 할까. 개량주의와 혁명주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대당 개념이지만, 세상에 흑백만 있는 게 아니니까, 그 사이에 뭔가 있다 치고, 그럼 뭘까? 조합원 이익만 챙기는 조합주의? 조각조각 갈라진 사안별 실천에 만족하는 부문주의? 늘 실험에 머무는 실험주의? 언젠가 도래할 진격의 때를 기다리는 대기주의? 대중의 바다에서는 실행하지 못하고 운동 언저리에서 열심히 주장하는 나팔주의? 그게 다 개량주의의 하위 범주인데, 개량주의 아니라고 부득불 손사래 치니까, 대체 뭐지? 안 개량주의? 안개량주의? 안개(량)주의? 안개주의? 안개? 아하, 그렇다. 한국 운동은 희뿌연 안개 속에 숨어, 자신으로부터 자신을 감추는 안개주의다.

자신은 아니라 손사래 치며 남들에게 손가락질하는 정파·운동가에게 묻는다. 개량주의 아니면 뭔가? 뭐라고? 무슨무슨파고 사회주의라서 개량주의가 아니라고? 이른바 무슨무슨파 하는 것은 노동운동 내 구분법인데, 그런 범주는 상대적 개념이고 이 파 저 파 할 것 없이 그 안에는 사회주의 아닌 경우가 부지기수 포함돼 있으니까 대꾸할 가치도 없고, 혁명주의든 개량주의든 그 전제인 사회주의를 기준으로 되묻겠다. 그럼 버니 샌더스도 혁명주의겠네. 사회주의를 기치로 건 조직이라 샌더스랑 다르다고? 그럼 사회주의보다 센 이름의 일본 공산당은 혁혁명주의겠네. 에이, 웃기려면 쪽파고 대파라서 개량주의 아니라 하든가. 20년 동안 우려먹어 전혀 웃기지도 않는 시시껄렁한 농담은 그만! 운동론을 근거로 진지하게 다시 묻는다. 개량주의 아니면, 대체 뭔데?

개량주의를 가르려면 100여년 전 과거로 돌아가야 한다. 카를 카우츠키 대 로자 룩셈부르크 논쟁이다. 레닌이 합세한 논쟁이다. 그게 역사적인 개량주의 대 혁명주의 논쟁이다. 거기서 비롯된 개념이 개량주의다. 논쟁을 거치며 개량주의 화신으로 낙인찍힌 카우츠키는 당시 유럽은 사회주의를 실현할 수 없는 단계라고 봤다. 노동자계급도 준비되지 않았다고 봤다. 사회주의 단계는 혁명을 거치지만, 객관적 조건이 무르익으면 필연으로 따라온다고 봤다. 그래서 자본주의 체제 내 개혁에 집중하며 계급의식을 높여야 한다고 했다. 그 노선은 북·서유럽으로 이어져 남아 있다. 이에 반해 혁명주의를 대표한 로자와 레닌은 사회주의 체제를 실현할 수 있는 단계로 봤다. 노동자계급도 준비돼 있다고 봤다. 전위가 추동하는 계급투쟁을 통해 자본주의를 전복하면 된다고 했다. 그래서 목적의식적 무장봉기로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전략을 실행했다. 그 노선은 소련·동유럽 등으로 이어지다가 근근이 명맥을 잇고 있다.

자, 다시 묻는다. 혁명주의는 ‘지금 여기에서’의 혁명을 통한 상부구조, 즉 국가권력 장악인데, 그 전략으로 계급을 선전·선동하고 조직하며 투쟁하고 있는가? 강령에 담겨 있고 마음속에 있다고? 그런데 아직 자본주의 체제가 완고하고 노동자계급도 준비되지 않았다고? 그래서 체제를 흔들지 못하고 개량투쟁에 집중하고 있다고? 언젠가 때가 성숙하면 그때 나설 거라고? 좋다. 객관 조건과 주체 상태 모두 혁명주의를 실현할 수 없는 상태니까 존중한다. 한데 그런 처지를 개량주의가 아니라고 하니까, 또 물을 수밖에 없다. 마르크스주의자에다 사회주의자였고, 언젠가 도래할 체제 전환의 필연적 시기에 혁명이 필요하다고 인정했던 카우츠키의 개량주의와 한국 안개주의는 도대체 뭐가 다른데?

한국 운동에는 혁명전략을 실천하는 단위가 없다. 그렇게 된 지 어언 20년이다. 한데 그 20년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그 20년은 운동이 한국 사회의 변화발전 전망을 제시하지 못한 잃어버린 20년이라는 점이다.

최선을 실현할 단계가 아니고 오랜 모색과 실험이 필요하다면, 운동은 긴 시간을 대체할 차선의 방책으로 북유럽시스템을 선택해야 했다. 북유럽은 운동이 대중과 호흡할 수 있는 유력한 방안이다. 생명과 생태와 노동과 여성과 평화와 통일 등의 제반 측면에서 현재의 한국 사회보다 훨씬 더 진전된 희망의 대안이다. 북유럽을 당면 대안으로 ‘따로 또 같이’ 전진해야 한다. 그러다가 꿈에도 갈망하는 전략이 나오면 선택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유의미한 차선을 현실에 두고도 선택하지 못했다. 운동의 과거가 만든 낙인 탓이다. 북유럽은 개량주의 상징이고 개량주의는 바퀴벌레였다. 한국 운동이 자본주의 체제 내의 민주주의 단계는 인정해도 북유럽 단계는 거부한 배경이다. 그래서다. 한국 운동은 차선은커녕 차차선도 아닌, 최악으로 치닫는 한국 자본주의 테두리 안에서 개량주의보다 못한 조합주의와 부문주의와 대기주의 등에 멈춘 채 전망과 방향 없는 사안별 실천에 전전하고 있다.

뜬금없는 개량주의자 선언의 또 하나의 배경이다. 지긋지긋한 개량주의 트라우마를 훌훌 털어 버리자. 혁명을 포기하라는 게 아니다. 유럽에도 혁명을 꿈꾸며, 모색하고 실험하는 이들은 많다. 한국보다 훨씬 더 많다. (다음 편으로 이어짐)

노동운동가 (jshan896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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