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재훈 여행작가

지금의 젊은 또래들과는 달리 1970년대에 나고 자란 이들에게는 누구나 한두 개쯤 골목에 관한 기억이 있을 것이다. 내 기억 속에 두 번째로 살았던 집이 부산 어느 동네의 골목 끝에서 두 번째 집이었다. 골목 입구에는 기와 얹은 철제대문집이 제법 사는 폼을 내고 있었고, 그 골목을 따라 오른쪽으로 한 번, 왼쪽으로 한 번 꺾은 뒤 막다른 벽을 보고 조금 걸으면 내가 살았던 그 두 번째 집이 나왔다. 사람들은 그 집을 ‘국민주택’이라고 불렀는데, 아마도 그즈음의 서민 임대주택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짐작해 본다. 골목은 입구에서 집 반대편인 왼쪽으로 꺾어 들어가면 꽤 길게 이어졌다. 몇 번을 꼬불거리다 만나게 되는 벽은 당시의 내 눈에는 성벽처럼 높아서 높이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늘 그 위에 뭐가 있을까 궁금해하기도 했었다. 골목 앞으로는 꽤 넓은 공터가 있어서, 학교를 마친 동네 아이들은 늘 거기 모여서 이리저리 쥐어 터진 축구공 하나를 가지고 대결을 벌이곤 했다. 학교도 가기 전이었던 나 같은 코 찔찔이들은 동네 형들이 한둘 비는 틈이 아니면 게임에 끼기도 힘들었다. 어쩌다 한 번씩 공을 만지더라도 헛발질하기 일쑤였는데, 한 번은 헛발질을 얼마나 심하게 했던지 그야말로 뒤로 자빠져서 머리가 깨지기도 했다. 서울에 올라온 뒤로도 골목은 제법 오래 남아 있었던 것 같다. 산동네가 재개발되기 전까지는 대부분 골목으로 이어져 있었으니까. 서울에서 공터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는데, 아마도 빈터부터 건물이 채워지고 나서야 산동네까지 잡아먹은 게 아닌가 싶다.

여행 얘기는 어디 가고 골목에 관한 사설이 이리 기냐는 불만의 소리가 어디선가 들리는 듯도 하니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분명 이 칼럼에도 독자가 있긴 있겠지? 흐흐흐). 유럽의 다른 도시들도 그렇겠지만, 스페인 소도시 여행에서 가장 행복한 경험은 바로 골목을 어슬렁거리며 걷는 일이다. 때로는 차 한 대 정도 지나갈 만한 넓이의 골목, 때로는 사람 둘이 딱 스치지 않을 만큼의 골목을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며 걷는 일. 특히 마드리드 근교의 관광지인 톨레도와 남부 세비야의 올드타운은 게으른 골목길 여행자의 감성을 심하게 돋게 만들어 준다. 두 곳 모두 높아야 3~4층 정도인 오래된 돌집이 꽉 들어차 있고, 그 집들 사이를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고 이리 이어지고 저리 이어진 골목길이 채우고 있다. 언뜻 골목길이 방향 없이 아무렇게나 향해 있을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대부분의 골목길들은 마치 실개천이 어떻게든 내리고 흘러 큰 강으로 모여들 듯이 결국은 성당이 자리 잡은 광장으로 향하기 마련이다.

골목길 양쪽 건물에는 주인장의 취향에 따라 회벽에 여러 색깔의 칠이 얹어져 있다. 길쪽으로 조그맣게 난 창문틀마다 어김없이 꽃 화분 몇 개씩이 놓여 있어 자칫 퉁명스러울 뻔한 벽에 생기를 돋게 해 준다. 크리스마스가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창문 끝에 매달린 산타클로스 인형이 행인들을 향해 궁둥이를 실룩거리는 모양도 정겹다. 가끔 창문을 열고 골목길을 무심히 내려다보는 할머니가 여행자들에게 따뜻한 눈웃음이나 인사 한마디 전해 오면, 그야말로 상상하던 완벽한 골목길에 들어서 있다는 충만감이 턱밑까지 차오른다. 여기에 골목길을 타고 내려오는 햇빛 한 줄기와 그 빛이 만들어 준 벽돌 틈새 양지 뜸에서 가릉거리는 길고양이 몇 마리까지 더해지면 골목길 여행은 절정에 이른다. 이 모든 눈요깃거리의 맛을 더 깊이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은 ‘걷는 소리’다. 우리네 예전 골목길은 흙길이거나 시멘트길이 대부분이었지만, 톨레도나 세비야는 모두 큼직큼직한 돌이 깔리거나 박혀 있는 길이다. 덕분에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저벅거리거나 또각거리거나 하는 소리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다. 저마다의 신발이나 굽 종류에 따라 걷는 소리도 천차만별 다채롭다. 구글 지도는 주머니 속에 집어넣고, 오로지 내 방향감각만으로 걸어보는 것도 좋다. 설령 길을 잃는다고 해 봐야 그 동네가 그 동네다. 톨레도나 세비야의 올드타운 모두 금세 돌아설 수 있는 걸음 안에 있을 테니까 걱정할 일은 아니다. 눈으로도 걷고, 귀로도 걸을 수 있는 데다, 미로 탈출 어드벤처까지 더해지는 골목길 어슬렁거리기! 이 정도면 최고의 체험 코스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한바탕 즐기거나 헤매거나 걷거나 하다 보면 여행자의 위장은 이미 아침에 먹은 것들을 밀어낸 공복에 위산을 마구 뿜어낸다. 갑작스러운 허기를 느낀 여행자는 골목길에서 빠져나오려 발걸음을 재촉한다. 공복의 여행자들이 골목길을 따라 흘러내려 온 광장에는 마치 이 모든 것이 설계돼 있었던 것처럼 카페와 식당이 테두리를 따라 진을 치고 있다. 동네 맛집들에서 광장쪽으로 풍기는 음식 냄새를 당해 낼 재주가 공복 여행자들에게는 없다. 이쯤 되면 이런 생각이 안 들 수가 없다.

“골목길들아! 너희는 다 계획이 있구나!”

여행작가 (ecocj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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