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국회 연설에서, 기준의 시대에서 계약의 시대로 가자고 말했다. 이 연설이 주는 단 하나의 장점은 제3자 보증인의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줬다는 것에 있다. 근로기준법은 그리고 노동법은 노동관계에서 제3자 보증인 역할을 수행한다. 기준은 계약 당사자들이 자유롭게 행위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한다. 헌법 32조3항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근로조건의 기준은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도록 법률로 정한다.” 기준에서 계약의 시대로 가자는 말은 노동관계에서 제3자 보증인의 존재를 삭제하고 개인들의 ‘자유로운’ 계산과 합의에 맡기자는 말이다. 그러나 제3자 보증인, 즉 기준이 사라진 노동관계는 더 이상 자유롭고 대등한 법률관계가 아니라 힘이 지배하는 권력관계로 변질된다. 그곳에는 노동법이라는 인간의 법 대신 약육강식이라는 자연의 법이 적용된다. 기준이 없으면 자유도 없으며 계약도 없다.

제3자 보증인은 권력이 아니라 권위다. 권력은 자기 뜻대로 할 수 있는 힘이다. 의지의 실현이다. 권위는 말과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원천이다. 준거고 각주다. 권력이 이차원이라면 권위는 삼차원이다. 세속권력의 이차원에 종교적 권위의 삼차원이 개입한다. 경제권력의 이차원에 정치적 권위의 삼차원이 개입한다. 계약권력의 이차원에 재판적 권위의 삼차원이 개입한다. 이렇게 해서 권력과 권위의 조화, 자율과 타율의 조화, 자유와 기준의 조화가 이뤄진다. 근대에 들어와 종교적 권위가 제거된 후 세속권력을 삼차원으로 재구성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됐다. 몽테스키외의 삼권분립은 세속권력 내부에서 권위를 만들어 내기 위해 고안됐다. 왜? 그래야 비로소 자유가 가능하니까. 기준과 한계가 설정되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자유와 계약이 가능하다. 기준은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자유답게 만들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사용자와 노동자 사이에 기준이 폐지되면, 그 다음에는 큰 사용자와 작은 사용자 사이에 기준이 폐지될 것이다. 결국 큰 사용자만 남아 시장을 지배하게 된다. 그 시장에는 더 이상 자유도 없고 계약도 없을 것이다.

노동관계를 계약의 언어로만 분석하는 민법의 관점은 노동과 인격을 분리하고 노동을 순전히 계약의 객체인 상품으로만 취급한다. 민법의 관점에서는 노동은 계약의 객체고 노동자는 계약의 주체다. 자본주의 경제질서는 이러한 이분법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허구다. 노동과 노동자는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노동을 상품으로 취급하는 자본주의 경제질서가 유지되려면 특수한 상품인 노동(력)의 생산과 재생산이 보장돼야 한다. 이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바로 노동법이다. 노동력의 재생산에는 현재 노동력의 재생산과 미래 노동력의 재생산 두 가지 차원이 있다. 특히 미래 노동력의 재생산이란 아이를 낳고 아이를 기르는 것, 즉 계보의 원리를 이어 가는 것, 한마디로 번식을 보장하는 것이다. 번식을 보장하는 제도를 갖추지 않은 사회는 없다. 그런 사회가 있다면 아마도 멸종을 목적으로 삼는 사회일 것이다.

직업세계가 변하고 있는 것은 맞다. 지금의 노동법이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것도 맞다. 그러나 자유계약이 대안이 될 수는 없다. 19세기에 노동법이 등장하기 전에도 임금노동은 자유계약의 이름으로 거래되고 있었다. 그 후 200년의 역사를 다시 복습할 필요는 없다. 노동관계를 규율하는 법질서의 역사는 신분에서 계약으로 발전했고, 다시 계약에서 기준으로 발전했다. 계약은 전근대사회의 신분을 폐지하는 데 기여했지만, 새로운 불평등을 초래했다. 계약은 노동자와 사용자 사이에 존재하는 현실의 불평등을 형식적 평등으로 은폐했다. 계약의 물신화는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들 사이의 약속이라는 계약의 이상 자체를 위협했다. 기준이 호출됐고, 기준은 계약을 수렁에서 건져 냈다. 기준에서 계약으로 되돌아가자는 주장은 다시 계약에서 신분으로 되돌아가자는 헛된 망상으로 이어질 것이다. 아니 이미 우리는 매일 목도하고 있다. 기준과 법의 권위가 약해지고 계약과 자유의 권력이 커지면서 새로운 신분관계가 부상하고 있음을.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jeseongpark@kli.re.kr)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