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노사관계컨설턴트

국제노동기구(ILO) 기본협약 비준과 관련해 대통령은 헌법이 보장한 비준권을 포기하고 극우세력이 무력화시킨 국회로 비준권을 넘기는 정치적 실수를 저질렀다. 개혁을 위해서는 방향성만큼 방법론도 중요한데 “상식을 뛰어넘는 상상력”을 발휘하기는커녕 기존의 낡은 관념과 타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물론 상상력의 부재, 낡은 관념과 한물간 타성에의 굴종은 노동운동의 문제임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글에서는 지난 1년 동안 ILO 기본협약 비준을 둘러싸고 벌어진 실천적 논의를 돌아보면서 성과를 짚어 보고, 비준 투쟁이 나아갈 방향을 살펴본다.

첫째, ‘선 비준’의 정당성이 이론과 실천에서 확립되고 ‘선 입법’의 허구성이 드러나고 있음을 지적하고 싶다. 1년 전 정부와 자본은 입법하지 않으면 비준할 수 없다는 ‘선 입법’ 입장을 강력하게 견지했고 여기에 노동운동도 부화뇌동했다. 지금 헌법상 국제조약 비준권은 대통령에게 있음이 분명히 드러났고 선 입법 논리는 허구였음이 점차 증명되고 있다.

역사적으로 대한민국에서 비준과 입법은 전혀 별개의 문제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대한민국이 2011년 비준한 47호 주 40시간 협약(1935년 제정)이다. 한국의 관료들은 주 48시간을 명시한 1호 협약(1919년 제정)을 비준하는 것은 현행 법령상 절대 불가하다는 입장이다. 이런 나라가 주 48시간(1호 협약)을 실현한 나라들을 위해 마련한 주 40시간 협약을 8년도 전에 넙죽 비준했다.

2001년 한국은 135호 노동자대표 보호 협약(1971년 제정)을 비준했다. 노조전임자 임금을 비롯한 노조활동 편의제공이 이미 확립돼 있던 상황에서 때늦은 비준이었다. 그런데 2010년을 전후로 이명박 정권과 추미애 당시 국회 환노위원장이 앞장서 노조전임자 임금을 비롯한 노조활동 지원을 금지하는 법 조항을 만들었다. 135호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방향으로 법령을 개악한 것이다.

16~18세 청소년들에게 심신과 도덕에 해를 끼치는 일을 시키면 안 된다는 138호 최저연령 협약(1973년 제정)을 한국이 비준한 지 벌써 20년이 넘어가지만 관련 법령들은 아직 정비되지 않고 있다. 역시 한국이 비준한 지 오래인 동등 가치 일(work of equal value)에 대한 동등 보수와 고용과 직업에서의 차별금지를 명시한 100호와 111호 협약에 관련된 법령들도 허술하기는 마찬가지다. 이미 비준한 29개 협약과 관련한 법령들을 살펴보면 입법의 완성도와 충실성에서 형편없는 것들이 수두룩하다. 대한민국에서 입법과 비준의 연계는 일종의 사기극이었던 셈이다.

둘째, ILO 기본협약이 노동자에게만 특별히 보장되는 노동권이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와 인권보장의 기초를 이루는 모든 시민의 기본권임이 밝혀졌다. 결사의 자유를 보장한 87호, 노동자의 단체교섭권 보장을 위해 사용자의 부당노동행위 금지 의무를 규정한 98호, 국가에 의한 노동력 동원을 금지한 29호, 국가에 의한 정치범 탄압을 금지한 105호, 일할 수 있는 최저 연령을 규율함으로써 아동노동 보호를 촉구한 138호, 성매매 등 아동에 대한 인신매매와 착취를 금지한 183호, 동등한 가치의 일을 하는 남녀에 대해 동등 임금을 보장한 100호, 국적과 인종 등에 따른 고용과 직업에서의 차별을 금지한 111호는 노동자 권리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출발점으로 국가와 개인, 그리고 국가와 시민사회의 관계를 규정한 자유권에 관련된 협약들이다.

셋째, 학계와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핵심협약’이라는 잘못된 번역을 교정해 ‘기본협약’으로 바로잡는 사례가 늘고 있다. 노동운동은 국가와 자본이 짜 놓은 '선 입법 프레임'에서는 벗어났으나 '핵심협약 프레임'에서는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ILO가 만드는 국제사회 노동법인 협약은 모두 190개다. 기본협약[Fundamental Conventions 8개], 정부정책(우선)협약[Governance(Priority) Conventions 4개], 기술협약[Technical Conventions 178개]으로 나뉜다. 사실 일의 세계(the world of work)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기술협약이다. 하루 8시간, 주 48시간을 규정한 1호 협약을 시작으로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해 일의 조건을 규율하는 협약들은 모두 기술협약 범주에 들기 때문이다.

결사의 자유와 단체교섭권, 강제노동과 아동노동 철폐, 남녀차별 금지 자체가 노동자가 일하는 조건을 바로 개선하는 것은 아니다. 근로감독과 3자 협의, 고용정책 등 정부가 우선해서 추진할 정책을 명시한 협약들이 일터의 안전과 노동자들의 건강을 바로 가져다주는 것도 아니다. 기본협약과 정부정책(우선)협약은 건강하고 안전한 일터를 만드는 데 필요한 기술협약을 비준하고 이행하는 데 도움을 주는 출발점의 역할을 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핵심’ 협약이라 불러야 할 것은 178개 기술협약들이다.

노동자들에게 시민으로서의 자유와 민주를 보장하는 토대를 이루는 기본협약과 노동행정의 기초를 이루는 정부정책(우선)협약의 비준율은 각각 50%(4개)와 75%(3개)다. 반면 일터의 노동조건 개선을 위한 방향과 내용을 규정한 기술협약 비준율은 12%(22개)에 불과하다. 대한민국이 노동자 절대 다수에게 여전히 ‘헬조선’인 이유는 노사정 3자 모두 ‘기본’을 ‘핵심’으로 착각하는 요술에 걸려 일터의 진짜 핵심인 기술협약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앞으로 노동운동은 'ILO 기본협약 비준 투쟁'을 'ILO 협약 비준 투쟁'으로 확대해야 한다. 정부정책(우선)협약 중 한국이 비준하지 않은 129호 농업근로감독(1969년 제정) 협약은 날로 중요해지는 농업노동자 문제를 푸는 핵심 고리다. 그리고 ILO 협약의 핵심이자 근간을 이루는 기술협약들에 대한 학습과 연구가 시급히 이뤄져 관련 협약들의 비준 캠페인으로 나아가야 한다. 마지막으로 비준되지 않은 협약들을 비준하기 위한 투쟁도 중요하지만, 이미 비준된 협약들에 관련된 법령의 완성도와 법집행 수준을 점검하는 사업이 시급하다. 이미 비준된 협약들에 대한 점검과 평가 작업은 향후 비준 투쟁이 나아갈 방향을 잡는 나침반이 돼 줄 것이다.

아시아노사관계컨설턴트 (webmaster@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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