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병철 청년유니온 위원장

차별은 사람을 아프게 한다. 개인의 존재에 사회적 등급이 매겨져 끊임없이 비교의 도마 위에 오른다. 인격이 훼손되고, 인격의 차별은 곧 먹고사는 문제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해 가난과 불안을 야기한다. 특히 경제가 어렵다는 주류담론은 차별을 더욱 공고화하는 데 잔인할 정도로 일조한다. 결국 수많은 차별에 놓인 사람들이 점차 다수가 됨으로써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아픔을 겪는다. 일터에서의 아픔은 물론이거니와, 성별 혹은 성 정체성·장애인·이주노동자·지역·학력·나이·가난 등 온갖 차별들은 사회를 잠식한다. 어디서부터 병을 치료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는다.

차별이 방치된 사회가 진짜 무서운 이유는 첫째로 개개인이 무기력에 빠져들기 쉽다는 것이다. 가난에서 해방돼 하고 싶은 일을 찾고, 다양한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과정을 통해 인격의 풍요로움을 누려 나가는 희망조차 접게 만든다. 이러한 희망의 단계를 국가가 보장해 주지도 못할뿐더러, 경제적 가난은 곧 마음의 가난을 낳아 사회문제에 눈을 돌리는 것조차 사치로 만든다. 둘째로 모두가 화가 나 있는 상태가 된다. 아픔을 겪고 있는 타인의 존재를 인정하고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대화하기보다 오로지 나만이 피해자라는 인식이 지배해 생기는 화병이다. 이러한 화병에 따른 주장은 당연히 대안을 제시하는 주장으로 진전되기도 어렵다. 결국 스스로가 문제 해결 주체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학습하고, 타인들과 관계를 형성하며 집단적 힘을 모아 내기 위한 노력조차 거부해 버린다. 결과는 비극적일 수밖에 없다. 나보다 힘이 없는 사람에게 문제의 원인을 돌려 내 자리를 침범하지 말라며 짜증과 냉소를 보낸다.

차별에 대응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금세 무너지기 쉽다는 위기감이 머릿속을 끊임없이 스친다. 대표적으로 최저임금 문제가 그렇다. 2년 전만 해도 대선후보들이 최저임금 1만원을 내세웠던 긍정적 분위기는 완전히 역전됐다. 이제는 최저임금은 경기침체의 주범이다. 최저임금 대폭인상에 따른 부정적 효과를 선동해 정치적 이익을 취하는 그들은 이제 차등적용을 강하게 내세우기 시작했다.

차별을 겪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무기력한 생태에 놓여 있거나, 분노의 화살이 표적에서 어긋나 버린 현실에서 최저임금 또한 무기력 상태에 빠져 있다. 화를 내기 가장 쉬운 대상도 바로 최저임금이다. 저임금 노동자들과 경영이 어려운 소상공인들이 사회경제적 빈곤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한 생산적 논의와 정치적 요구가 형성되지 않는다면, 최저임금은 끊임없이 죄인 취급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결국 최저임금마저 차별하겠다는 비겁함이 점차 합리적 요구처럼 굳어질 것이란 예상이 충분히 들 수밖에 없다.

올해 청년유니온은 최저임금 운동의 핵심으로 차등적용은 절대 안 된다는 기조를 내세웠다. 아직까진 최저임금 차등적용을 사회가 수용할 수 없다는 의견이 우세해 차등적용 방어를 전면에 내세운 운동을 굳이 펼칠 필요가 있겠냐는 질문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부터라도 최저임금 차등적용이 지닌 심각한 문제를 알리지 않는다면, 설마 했던 최저임금 차등적용이 몇 년 내에 정말로 이뤄질 것만 같다.

청년유니온은 지난주 금요일부터 매일 거리로 나가 최저임금 차등적용이 이뤄져선 안 된다는 목소리를 시민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그리고 최저임금 차등적용을 반대한다는 각자의 이유가 담긴 시민 352명의 엽서를 받아 최저임금위원회에 전달했다. 차별을 공고히 하려는 사회에서 최저임금마저 차별하려는 현실에 청년유니온이 이렇게 나설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최저임금 차등적용을 방어한다는 건 우리들의 삶을 둘러싼 모든 차별을 해결해 나가자는 진심 어린 의미가 담겨 있다. 여기에 청년유니온을 비롯해 노동운동도 많은 역할을 펼쳐 나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352개의 엽서 중 가장 절실히 다가왔던 이야기를 남기며 글을 마친다.

“모두가 힘든 때입니다. 더 힘들게 하지 말아 주세요. 모두가 잘살 수 있도록 해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청년유니온 위원장 (cheol371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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