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균 없는 김용균법.” 정부 산업안전보건법 하위법령 입법예고안을 두고 노동계와 노동안전단체가 하는 말이다. 위험의 외주화로 비정규 노동자들의 죽음이 잇따르는데 입법예고안이 산재 원인인 외주화를 막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산재로 가족을 잃은 유가족 생각도 다르지 않다. 정부에 의견서도 내고 기자회견도 하고 청와대를 찾아 호소도 한다. 제발 하위법령을 제대로 개정하라고. 다시는 김용균 동료들의 죽음을 보지 않게 해 달라고. 태안 화력발전소 노동자 김용균씨 어머니 김미숙씨, 건설노동자 김태규씨 누나 김도현씨, 삼성전자 노동자 황유미씨 아버지 황상기씨, 이한빛 PD 아버지 이용관씨, 제주 현장실습생 이민호군 아버지 이상영씨가 글을 보내왔다.<편집자>
 

▲ 이용관씨(고 이한빛 PD 아버지)

아들 한빛이는 tvN <혼술남녀> 조연출을 맡았다. 한 편의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 함께 일하는 비정규직 스태프들의 노동인권 문제를 고발하며, 2016년 죽음으로 항거한 27살 아름다운 청년이었다. 아들의 죽음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자,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에 애도와 함께 진상규명과 재발방지 대책을 요구하며 다시는 이한빛 PD와 같은 죽음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 메시지는 무척이나 큰 힘이 돼 자신들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던 CJ ENM이 유가족과 방송노동자들 앞에서 책임을 인정하는 계기가 됐다.

동시에 CJ ENM은 유가족들에게 진심 어린 사과와 함께 방송 노동환경 개선과 재발방지 대책 이행을 약속했다. 그 후 CJ ENM에서 받은 위로금, 그리고 이한빛 PD의 죽음을 함께 추모하며 방송 노동환경이 하루빨리 개선되기를 원하는 분들이 조금씩 건네 준 후원금을 바탕으로 2018년 한빛미디어 노동인권센터를 설립해 활동 중이다.

하지만 방송계는 아직 갈 길이 멀다. 방송제작 현장의 카메라 뒤 노동자는 아직도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한다. 허울뿐인 ‘개인 사업자’라는 미명 아래 방송노동자들은 산업안전보건법과 근로기준법이 적용되지 않는 ‘노동의 사각지대’에 놓여 고통과 죽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분명 방송사 지시에 따라 방송 프로그램을 촬영하는 ‘노동자’지만, 노동자성을 인정받지 못하기에 근로계약서도 작성하지 못하는 사례가 넘쳐 난다. 아무리 장시간 촬영을 해도 하루 일당만 주는 초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살인적인 노동환경이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산업안전보건법이 개정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방송제작 현장에 변화가 일 수 있다는 기대에 부풀었다. 그러나 산업안전보건법 하위법령 개정안을 확인하고는 큰 한숨을 쉬고 말았다. 정부는 법의 보호대상이 확대됨에 따라 특수형태근로종사자에 대한 안전조치 및 보건조치를 마련함으로써 산업재해 예방에 기여하고자 하위법령을 개정한다고 그 취지를 밝혔다.

그러나 실제로는 산재보험 적용 9개 직종으로만 매우 협소하게 특수고용 노동자를 정의했다. 아들이 몸담았던 영화·드라마 촬영현장 노동자는 빠졌다. 미술 작업과 세트 공사를 하는 노동자들은 소규모 건설공사와 거의 유사한 작업을 해야 한다. 각종 설비위험에 의한 사고가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지만, 이들 역시 포함되지 않았다. 각종 무용 공연이나, 전시 등에서도 다양한 위험에 노출되기는 마찬가지다. 뿐만 아니라 방송작가, 화물운송 노동자, 학원버스·어린이집 버스 운전원, 미용업·세탁업, 장례식 도우미, 관광통역사, 간병노동자 등 다양한 직종의 노동자가 적용대상에서 배제됐다.

오랜 시간 동안 방송 노동은 노동시간 적용 특례업종에, 산업안전보건법의 예외업종으로 지정돼 있었다. 그로 인해 방송노동자들은 지속적으로 고강도의 야간·장시간 촬영을 하며 각종 질병에 시달리는 것은 물론 심하면 과로사 등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지속적으로 일어났다. 게다가 방송제작 노동은 현장의 특성상 특정 장소에서 비교적 단기간 동안 촬영하는 일이 많다. 이전부터 노동안전보건과 거리가 멀었던 영역이기 때문에 안전관리 책임자가 전혀 배치되지 않고, 그로 인해 현장에서 노동안전에 대한 감시는 전혀 이뤄지고 있지 않다. 한빛센터를 비롯한 수많은 방송노동자들이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을 통해 방송 노동에서 오랫동안 지속된 ‘죽음의 외주화’가 끝이 날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이번 산업안전보건법 하위법령 개정안은 개정 취지와 다르게 큰 폭으로 후퇴했고, 방송제작 현장의 ‘죽음의 외주화’가 앞으로도 쉽게 멈추지 않을 것 같아 무척 우려스럽다.

방송제작 현장은 다단계 하도급 구조로 인해 ‘노동자도 없고 사용자도 없는’ 노동의 사각지대로 남아 있다.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방송 노동 현장에서 수많은 노동자의 피와 땀을 갉아먹는, 그리고 목숨을 담보로 한 살인적인 노동을 이제는 그만 멈춰야 한다. 대통령의 말씀처럼 노동자 개개인이 자기 노동의 가치에 행복감을 누릴 수 있는 ‘노동존중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 중요한 한 걸음이 제대로 된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일 것이다. 대통령이 나서서 정부와 관련부처가 방송노동자를 비롯한 특수고용 노동자들도 평등하게 안전하게 일할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는 제도와 정책을 만들고 법령으로 제정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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