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지원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원

최근 미국에서는 사회주의가 뜨거운 감자다. 갤럽 여론조사에 따르면 18~29세 미국 청년 중 절반 가까이가 사회주의에 우호적이다. 민주당 정치인 중 스스로를 '민주적 사회주의자'로 지칭하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마르크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나의 유령, 사회주의라는 유령이 미국을 떠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여기서 질문. 도대체 이 사회주의는 무엇을 지향하는 것일까.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뚜렷하지는 않은 것 같다. 사회주의는 엄연히 현존했던 체제다. 이상적인 것들을 밀어 넣는다고 사회주의가 실패했던 원인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현실 사회주의 원형이라 할 소련에서는 국영기업이 국민 모두를 의무적으로 고용했다. 국가 계획하에 자원 배분과 생산물 분배가 이뤄졌다. 소련과 미국의 차이는 간단하게 말해 두 가지다. 첫째, 자원 배분과 생산 분배를 최적화하는 방법이다. 소련은 국가계획으로, 미국은 시장경쟁으로 이를 달성하려 했다. 둘째, 실업에 대한 태도다. 소련은 완전고용을 원칙으로 삼았고, 미국은 완전고용을 추구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실업을 유지하며 이를 관리하려 했다.

소련의 계획경제, 완전고용체제는 적어도 1970년대 이전까지 대단한 성과를 거뒀다. 로버트 앨런의 분석에 따르면 20세기 초 저소득 국가 중 1970년까지 가장 크게 성장한 나라 1위가 일본, 2위가 소련이었다.

하지만 소련의 경제성장은 지속될 수 없었다. 우선 계획에 문제가 있었다. 당 수뇌부에서 결정하는 계획은 실패를 조정할 능력이 없었다. 시장경제는 다수 기업의 이윤경쟁으로 자원 배분의 비효율성을 상시적으로 조정한다. 반면 소련은 자원 배분이 비효율적일 경우 이를 지도부가 인지해 수정해야 하는데, 숙청이 반복되던 당에서 부정적 피드백을 전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당 지도부의 계획 실패는 곧바로 회복 불가능한 피해로 이어진다. 70년대 소련에서는 이런 계획 실패가 누적됐다. 당 지도부의 연이은 잘못된 판단과 군사경쟁 탓이었다. 소련과 비슷한 시기에 위기에 빠진 미국이 구조조정·세계화·정보통신산업 등 시장의 조정으로 위기를 관리했던 것과 차이가 있다.

다음으로 완전고용 문제가 있었다. 소련 국영기업들은 완전고용을 위해 노동을 소비하고 기계를 절약했다. 한마디로 완전고용을 위해 노동생산성을 희생시켰다. 이런 체제는 인구성장이 멈추면 심각한 문제에 부딪힌다. 인구정체 상태에서는 노동생산성 상승만이 경제를 성장시킬 수 있다. 소련 인구는 70년대부터 급격하게 증가율이 둔화됐다. 이런 인구정체가 경제위기를 가속화시켰다. 한편 자본주의는 노동을 절약하고 자본을 소모하는 체제다. 노동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기업들이 기술을 혁신하고 자본을 투자한다. 절약된 노동은 경제가 불황에 빠지면 실업자로 관리된다. 경제위기를 실업의 고통으로 관리한다.

물론 소련 경제가 실패했다고 미국 자본주의가 영원히 지속가능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지만 자본주의가 이윤율 저하라는 숙명을 극복하지 못하면 구조적 위기에 빠진다. 말하자면 지속 불가능한 두 체제에서 소련이 좀 더 취약했다는 것이다.

서유럽의 여러 혁명을 거치며 형성된 자유주의는 모든 인간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권리를 누릴 수 있다고 표명했다. 신분제는 폐지됐고, 투표권은 나름 평등해졌다. 하지만 이런 자유와 평등은 공동체의 토대라 할 경제에서 모순에 부딪혔다. 자유는 재산에 대한 사적소유권이었고, 평등은 소유권의 동등함이었기 때문이다.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는 노동자를 착취해 재산을 증식하는 데 반해 노동력 소유자인 노동자는 기껏해야 자본가에게 적당한 보상만 받을 뿐이다. 자본가와 노동자 간의 근본적 불평등이 시장경제의 법칙이다.

사회주의는 경제를 변혁해 자유와 평등을 제대로 확대해 보려는 근대 프로젝트였다. 풍요를 늘리는 생산수단은 개인이 아니라 집단이 소유한다. 무엇을 얼마나 어떻게 생산할지, 즉 자원 배분은 여러 노동자협동조합들의 협의로 결정된다. 노동자는 고용되는 것이 아니라 노동으로 자아를 실현하는 자유인으로 생산에 참여한다. 생산물은 사회적 합의로 세워진 기준에 따라 일한 만큼 분배된다. 개인들이 사회적 분업에 참여하는 인센티브는 개인적 소유다. 개인은 노동하는 스스로를 온전히 소유하려 노력한다.

물론 소련은 이런 지향과 거리가 멀었다. 생산수단의 집단적 소유나 자원 배분은 모두 국가에 귀속됐다. 노동자는 민간이 아닌 국영기업에 고용됐을 뿐이다. 교육 기회는 확대됐지만 노동자가 교육받아야 하는 동기는 모호해졌다. 형태만 달라졌을 뿐 본질은 자본주의와 달라진 것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련을 국가자본주의라고 부른다. 비대해진 국가는 자유주의가 달성한 것마저 축소시켰다.

미국을 비롯해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단체들은 이런 실패 탓에 사회주의 앞에 ‘민주적’이라는 수식어를 많이 붙인다. 그러나 이런 말로 소련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한계를 극복하긴 어렵다. 계획과 완전고용체제는 지속가능한 성장에 실패했다. 그런데 생산수단의 사적소유권을 그대로 두고는 노동착취가 사라지지 않는다. 상품시장에서는 가격경쟁의 결과로 불평등이 확대된다. 소련은 이 모든 것을 국가로 해결하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민주적이란 수식어는 이 문제 중에 그 어떤 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미국의 민주적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적 문제의 상당 부분을 여전히 국가 정책 변화로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듯 보인다.

오늘날 사회주의는 사회주의적 이상을 포기하지 않고, 소련의 실패도 넘어서야 한다. 답을 당장 낼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과거의 실패를 외면하지는 않아야 재도전을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원 (jwhan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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