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제성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예전에 어떤 인터넷 사이트에 다음과 같은 글을 쓴 적이 있다. 조금 길지만 전문을 인용한다.

“진보는 친기업 하면 안 되는가? 안 된다. 왜 안 되는가? 오늘날 기업은 평등·연대·생태의 가치와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업의 목적은 이윤 추구가 아니다. 기업의 목적은 사회가 필요로 하는 재화와 용역을 만들어 내어 사회에 이바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기업은 이윤 추구만을 목적으로 하는 괴물이 돼 버렸다. 그 목적에 방해가 되는 모든 인간적·사회적 가치는 제거해야 할 악이 됐다. 기업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인간은 이윤 창출에 복무하는 하나의 자원, 인적 자원으로 전락한다. 그렇지 못한 인간은 인간쓰레기로 취급받는다. 이런 전체주의 사회에서 교육은 자원 개발과 쓰레기 재활용으로 변질된다. 먹고사는 문제가 곧 친기업을 정당화시켜 주지는 않는다. 진보의 대안은 기업을 본래의 자리로, 이윤 추구가 아니라 사회의 필요에 이바지하는 자리로 되돌려 놓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야 친기업 운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은 반기업이다.”

찬반 댓글이 뜨거웠다. 기업이 이윤을 추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무슨 소리냐 하는 의견과 기업이 이윤만 추구하는 것은 문제지만 그렇다고 기업의 목적이 이윤 추구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지나치게 이상적이라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다. 미국의 신자유주의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은 이렇게 말했다. “기업의 경영자는 기업 소유자의 피고용인이다. 피고용인은 고용인에 대해 직접 책임을 진다. 이 책임은 고용인의 욕망에 맞춰 기업을 경영하는 것이다. 이는 일반적으로 가능한 한 많은 돈을 버는 것이다.”

뭐가 문제겠는가? 기업이 노동법을 잘 지키고, 세금을 잘 내고, 자연과 환경을 보호하면서 돈을 번다면 말이다. 기업이 이익 추구에 집중할 수 있는 것은 계산의 토대가 되는 비계산의 영역을 공적인 것이 맡아 주기 때문이다. 노동력이 재생산되지 않고 세대가 이어지지 않으면 기업은 더 이상 필요한 노동력을 얻을 수 없을 것인데, 노동력의 재생산과 세대의 지속을 보장해 주는 것이 노동법과 사회보장법이다. 자연이 보존되지 않으면 기업은 더 이상 필요한 자원을 얻을 수 없을 것인데, 자연의 보존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이 환경법이다. 세금을 내지 않으면 기업은 사업 수행에 필요한 모든 기반 시설과 제도를 스스로 구축해야 할 것인데, 그러한 인프라와 제도를 구축해 줌으로써 기업의 영업활동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조세법이다.

노동법·사회보장법·환경법·조세법 등은 모두 타율적 규칙이다. 요즘 유행어로 말하자면 "규제"에 해당한다. 이것은 이해타산이나 비용편익분석의 결과로 도출된 "규범상품"이 아니다. 반대로 이것은 그러한 경제적 계산을 가능하게 하는 토대를 형성한다. 이런 타율적 규칙을 준수할 때에만 비로소 기업의 자유가 가능하다. 자율은 타율 안에서 가능하고, 시장은 법과 제도의 경계선 안에서 형성된다. 벨기에 브뤼셀의 시청 앞 광장은 이러한 이치를 건축학적으로 가장 아름답게 구현한 곳 중 하나다. 이곳은 원래 중세시대 시장이었다. 이 시장을 둘러싸고 있는 건물들은 관공서와 노동조합의 전신인 길드 본부로 쓰이던 것이다. 가장 높은 건물인 시청은 광장 전체를 굽어보고 있으며, 제빵공들의 길드하우스 "스페인왕", 기름공들의 "손수레", 봉제공들의 "여우", 뱃사공들의 "뿔나팔" 등이 있다. 정육노동자 길드하우스 "백조"에서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산당선언을 집필했고 벨기에 노동당이 결성됐다. 아마도 그래서 빅토르 위고는 이곳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이라고 했으리라.

이 타율적 규칙의 이름이 곧 "사회정의"고, 경제적 자유는 사회정의 한계 안에서 보장된다고 규정했던 1948년 제헌헌법이 천명한 정신도 바로 이것이다. 오늘날 기업의 이윤 추구가 문제 되는 것은 이런 타율적 규칙의 레종데트르(존재의 의의)를 전면 부정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경제적 자유의 기초, 기업의 존립 기반 그 자체를 무너뜨리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jeseongpark@kli.r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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