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통공사 차량파트에서 일하는 박희석(59) 차장은 이달 2일 하루를 현장방문에 썼다. 동료들이 매일 일터에서 겪는 고충을 보고 애로사항을 청취했다. 그는 공사 33년차 직원이다, 박 차장에게 남다른 권한이 주어진 것은 공사가 2017년 9월부터 운영하는 노동자이사제 때문이다.

박 차장은 노동자이사 임기를 시작한 뒤 매주 한 차례 현장을 찾는다. 지금까지 77번 현장을 방문했다.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출산휴가를 못 갈 뻔한 여직원에게 쉴 기회를 줬다. 공사가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과정에서 모범사례를 만든 것도 그가 현장과 경영진 사이를 분주하게 오간 탓이다. 박희석 노동자이사는 “제도 도입 이후 거둔 성과를 계량적으로 표현하긴 어렵지만 크고 작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며 “무엇보다 이사회가 건강해진 것이 과거와 달라진 점”이라고 말했다.

"이사회에 긴장감 부여, 거수기 역할 탈피"

서울시는 2017년부터 산하 16개 투자·출연기관에서 노동자이사제를 운영하고 있다. 전년 9월 ‘서울특별시 근로자이사제 운영에 관한 조례’가 발효된 것에 따른 조치다. 지금은 조례 개정으로 노동자이사제가 공식 명칭이 됐다. 노동자이사제로 무엇이 달라졌냐고 묻는다면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변화는 사업장 구석구석에서 '느리고 조용하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서울에 있는 기업과 소상공인들의 자금융통을 돕는 서울신용보증재단도 그중 하나다.

“회사의 경영 화두를 함께 고민하는 파트너가 생겼습니다. 노동자이사가 노조와 회사 소통의 한 축을 맡고 있어요. 이사회가 열리면 주요 안건을 두고 노조 의견이 최대한 반영될 수 있도록 함께 상의하고 내용을 공유합니다.”

정승모 사무금융노조 서울신용보증재단지부장의 말이다. 2004년 재단에 입사해 채권관리 및 회생지원업무를 하는 천기문(42)씨가 현재 노동자이사로 활동 중이다. 그에게 “노동자이사제도가 도입된 이후 어떤 변화가 생겼냐”고 묻자 “제도에 대한 저변이 부족하다”는 답이 돌아왔다.

제도 도입 초창기에는 운영 과정상 문제점이 드러나는 만큼 괄목할 만한 성과가 나올 단계는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데 자세히 뜯어보면 꼭 그런 것도 아니다. 작지만 나중에 큰 변화를 가져올 물꼬가 트이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재단 인사위원회는 직원에게 징계를 내릴 때 이의신청을 7일 내에서 받았다. 지금은 기간이 14일로 늘었다. 천기문 노동자이사가 재단에 "이의신청 기간이 너무 짧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인력채용 공정성을 담보하는 것도 그의 역할이다. 천 이사가 취임한 뒤 재단 채용은 외부공개 방식으로 바뀌었다. 서울시가 제도를 도입할 때 반대파의 가장 큰 우려는 "노동자이사가 노조 편만 들 것"이라는 점이었다.

최근 재단 노사갈등 해소사례는 이 같은 우려가 기우였다는 것을 보여 준다. 지금껏 재단 직원 퇴근시간은 관행에 따라 오후 5시30분이었다. 직원들이 점심시간을 30분간 교대로 쓰는 것을 반영했다. 그런데 최근 사측이 취업규칙에 따라 퇴근시간을 오후 6시로 하자고 주장했다. 노조는 반대했다. 노사 의견이 맞부딪혔다. 그때 천기문 노동자이사가 나섰다. 천 이사는 “퇴근시간을 오후 6시로 하고, 그에 맞게 직원들에게 특별휴가를 부여하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노사가 이에 동의하면서 갈등이 풀렸다.

반대파 "안건 부결률 높아질 것" 통계로 '불식'

서울교통공사가 지난해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할 시기에 노동자이사가 했던 역할도 이와 유사하다. 당시 노동자이사를 제외한 경영진은 기존 비정규직들에게 별도직급(8급)을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예 정규직 전환에 반대하는 정규직들도 많았다. 박희석 노동자이사가 분주해졌다. 직원들과 임원들을 수차례 만나 설득한 끝에 7급보(재직기간 3년 미만)라는 절충점을 찾았다.

박 이사에게 현장순회를 하면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를 물었다. 그는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전환된 여직원 이야기를 했다.

“지난해 4월 출산을 앞둔 여직원이 있었습니다. 그해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전환된 직원이었죠. 그런데 공사 규정상 입사 1년이 경과해야만 출산휴가를 쓸 수 있거든요. 사장과 담판을 지었습니다. 차별이고, 규정이 잘못됐다고요. 결국 출산휴가를 가게 했습니다. 해당 여직원과 노조간부가 노동자이사제도 덕분이라고 좋아했던 기억이 나네요.”

노동자이사와 서울교통공사노조는 한 달에 한 번 정례미팅을 한다. 이사회는 격월로 열린다. 김정섭 노조 정책실장은 “정기미팅과 별개로 이사회가 있는 달에는 사전에 노동자이사를 만나 부의안건을 리뷰하고 의견을 교환한다”며 “두 명의 노동자이사가 현재 조합원은 아니지만 통합 전 두 노조 추천으로 일을 하고 있어 현장과 괴리되지 않고 상시적으로 소통한다”고 전했다.

서울시 관계자는 “아직 제도 도입에 따른 가시적인 성과가 통계나 수치로 나오는 단계는 아니다”면서도 “각 기관 내부 사정을 잘 아는 노동자이사들이 이사회에 참여함으로써 다른 이사들을 긴장시키고 활발한 토론을 불러 사외이사들이 거수기 역할에서 탈피하도록 한 것이 제도가 가져온 가장 긍정적인 효과”라고 평가했다.

노동자이사제 도입에 반대했던 쪽의 우려를 불식하는 통계도 있다. 이들은 제도가 시행되면 이사회 안건 통과 비율이 낮아질 것으로 예측했다. 안건 부결률이 높아질 것으로 봤다. 노동자이사제를 도입한 서울시 산하기관 이사회가 최근까지 처리한 안건은 591건이다. 이 중 507건이 원안의결, 48건이 수정의결됐다.

천기문 노동자이사는 “모든 기관에서 노동자이사제 도입을 전후해 이사회 안건 통과 비율에 차이가 없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며 “노동자이사가 반대를 위한 반대가 아닌 노사 화합과 협치를 위해 활동하고 있다는 방증”이라고 말했다.

금융권 노동자이사제 도전, 법·제도 한계로 '제자리'

노동자이사제 도입 효과가 서서히 검증되면서 다른 지방자치단체들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인천시·광주시·경기도는 이미 노동자이사제 도입을 위한 조례를 만들었다. 부산시와 대구시는 조례 제정을 검토 중이다.

금융권을 중심으로 민간·공공에서도 유사한 도전이 이어지고 있다. 금융노조 KB국민은행지부 사례가 대표적이다. 엄밀히 말해 서울시 노동자이사제의 전 단계인 노동자 추천 이사제로 볼 수 있다. 지부와 KB금융지주 우리사주조합은 2017년부터 세 차례에 걸쳐 주주총회 주주제안으로 사외이사를 선임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부족한 지분율과 보수언론의 공격으로 시기상조 여론이 형성된 탓이다.

지부와 우리사주조합은 이에 따라 지분율 확대와 더불어 우리사주조합협의회 활동을 강화할 계획이다. 법·제도 개선운동을 통해 도전을 이어 간다. 올해 초부터 금융공기업 노조 안에서 일었던 노동자이사제 바람은 잦아든 상태다.

금융노조 한국산업은행지부는 노사협의회에서 노조에 사외이사 1명 이상을 추천하는 권한을 부여하도록 정관을 변경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임원추천위원회 위원으로 노조 대표 1인 참여를 보장하라는 것도 주요 요구다.

김영 지부 수석부위원장은 “현행 제도하에서 사외이사 추천을 강행하면 노사가 소모적인 갈등에 내몰릴 것으로 판단했다”며 “제도적 기반을 탄탄하게 한 뒤 내년 임기가 만료되는 사외이사 자리에 노동자 추천 인사를 앉히는 것을 새로운 목표로 잡았다”고 설명했다.

수출입은행 노동자들은 연말 임기가 만료되는 사외이사(2명) 자리에 주목하고 있다. 신현호 금융노조 한국수출입은행지부 위원장은 “반복적인 낙하산 인사로 몸살을 겪은 수출입은행이 국책은행으로서 장기 비전을 갖고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노동자 추천 사외이사가 반드시 필요하다”며 “사측과 논의 중인 주 52시간 이슈를 마무리하는 대로 사외이사 선임활동에 나설 계획”이라고 말했다.

금융노조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 산별중앙교섭에서도 노동자이사제 도입을 공식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노동자이사제가 금융 공공성을 강화하고,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는 금융지주사 회장 비리를 견제하는 효과가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금융산업사용자협의회는 지난 2일 노조에 반대 입장을 전했다. 협의회 관계자는 “노동자이사제는 현행 상법이나 공공기관의 운영에 관한 법률(공공기관운영법)을 볼 때 도입이 어렵다”며 “지난해 향후 법 개정이 이뤄질 경우 논의하기로 했고, 현재까지 아무런 변화가 없는 상황에서 다시 논의할 수 없다”고 말했다. 노동계가 "노동자이사제 도입을 위해 역할을 해야 한다"고 국회와 정부에 촉구하는 이유다.

실효성 없는 '근로자 참관제'로 국정과제 퇴색

노동자이사제 도입은 문재인 정부 100대 국정과제 중 하나다. 국정기획자문위원회는 2017년 7월 기획재정부에 공공기관 비상임 이사에 노동자 대표를 포함시키라고 권고했다. 비슷한 시기 박광온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공공기관 이사에 노동자 대표 1인 이상을 의무적으로 포함하는 내용의 공공기관운영법 개정안을 내놨다. 권고가 나온 지 2년이 되도록 기획재정부는 손을 놓고 있다. 기획재정부의 안일한 태도는 지난해 10월31일 진행된 공공기관운영위원회 15차 회의에서 엿볼 수 있다.

당시 회의록을 보면 기재부는 "국회에서 관련 법 개정 논의가 더디다"는 이유로 근로자 참관제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올해부터 일부 공공기관을 대상으로 시범사업이 운영된다. 근로자 참관제는 말 그대로 노동자 대표에게 이사회 구경(?)을 허용하는 제도다. 의결권이 없다. 발언도 의장이 허락해야만 주어진다. 노동자이사제에 한참 못 미치는 제도다.

국회에서는 2017년 이후 법 개정 논의가 중단됐다. 소관 상임위원회 소위원회에 묶여 있다. 박광온 의원측은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경제재정소위원회에 법안이 계류 중인 것만 확인된다”며 “박 의원의 소관 상임위원회가 바뀐 이후 법 개정 논의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고 밝혔다.

기획재정위 관계자는 "박광온 의원 법안이 발의된 그해 잠깐 심사가 이뤄진 적은 있지만 야당 반대로 논의가 이어지지 못했다"며 "2017년 이후 법안이 심사된 적은 없는데 워낙 많은 법안이 다뤄지고 있어 지금은 우선순위에서 밀렸다"고 말했다.

노광표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소장은 “기재부가 대통령 공약을 이행하려 든다면 자체적으로 법 개정안부터 내놓아야 하는데 형식논리로 국회를 핑계 삼고 있다”며 “실제 의지가 있다면 몇몇 공공기관을 대상으로 시범실시를 하고 문제를 공론화하면 되는데 근로자 참관제를 한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기재부 관계자는 “공공기관 근로자 이사제 담당자가 한 명뿐”이라며 “부재 중이라서 설명해 줄 수 있는 내용이 없다”고 말했다.

양우람 기자

서울시 노동자이사제, 유럽과 어떻게 다를까

서울시가 국내에서 노동자이사제를 선도하는 것은 맞지만 외국과 비교하면 갈 길이 멀다. 대표적인 것이 조례로 노동자이사 자격을 비조합원으로 한정하는 조항이다. 서울시 산하기관에서 노동자이사가 되려면 노조를 탈퇴해야 한다. 노동자이사제를 먼저 도입한 유럽 대다수 국가가 조합원과 비조합원을 가리지 않고 노동자대표를 뽑는 것과 비교된다.

이사회에서 노동자대표가 차지하는 비중 역시 선진국에 비해 많이 부족하다. 서울시는 노동자가 300명 이하 기관은 1명, 이상인 기관은 2명을 노동자이사로 임명한다.

반면 오스트리아·덴마크·프랑스 등은 이사회 정수의 3분의 1이 노동자 대표다. 독일은 2분의 1을 노동자로 채운다. 서울교통공사의 이사회 구성원(13명·감사 포함) 중 노동자이사가 차지하는 비중은 6분의 1에도 못 미친다. 안건부의권이 없는 것도 개선과제로 꼽힌다. 독일 감독이사회에는 안건부의권이 있다. 독일 기업 이사회는 감독이사회와 경영이사회로 이원화돼 있다.

박희석 서울교통공사 노동자이사는 "서울시 산하 각 공기업 정관을 보면 이사 3인 이상이 이사회를 요구하면 의장이 열도록 돼 있다"며 "이사회의 시기·목적·장소를 감안하도록 돼 있는데, 이를 확대·조정하는 방식으로 이사들에게 안건부의권을 부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임원추천권을 사외이사에게 주면서 노동자이사는 제외한 것도 한계로 지적된다. 서울시 조례에 명시된 “노동자이사는 일반 비상임이사와 동일한 권한을 가진다”는 조항과 모순되는 내용이다.

현재 서울시의회 이태성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권수정 정의당 의원을 중심으로 노동자이사제 개선을 위한 조례 개정이 추진되고 있다. 6월께 조례 개정안이 발의될 것으로 예상된다. 노동자이사에게 감사청구권을 부여하는 방안이 포함될 것으로 보인다.

양우람 기자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