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훈 기자

"사람답게 살고 싶어서 노조를 만들고 회사에 당연한 걸 요구했더니 덜컥 직장폐쇄를 하더라고요. 파업시 대체인력까지 허용하는 노동개악을 한다니요. 우리처럼 일하다 다쳐도 병원에 못 가는 노동자들은 노조 만들어서 뭐합니까?"

민주노총 신생노조 조합원 울분 토로
"노조 만들면 뭐하나. 노조할 권리는 어디에"


1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만난 김정훈씨는 시멘트를 생산하는 쌍용양회 동해공장에서 대형중장비를 수리하는 정비노동자다. 관리자들의 갑질에 성난 정비노동자들이 지난해 6월 노조를 설립했다. 민주노총 강원영동지역노조 쌍용양회정비지부 부지부장을 맡은 김씨는 조합원들과 함께 처음으로 노동절 집회에 참석했다.

김씨도 갑질 피해자다. 망치질 중 튄 쇳조각이 눈에 박혔는데, "물로 씻으라"는 말을 들었다. 병원은 퇴근 후에야 갈 수 있었다. 노조 설립 후 사정은 달라졌을까. 회사 탄압은 외려 심해졌다. 조합원 중 한 명만 콕 집어 한여름 땡볕에서 용접을 시켰고, 비 오는 날에는 제초작업을 시켰다.

그는 "회사가 38일 만에 직장폐쇄를 해제했는데, 여전히 노조사무실·타임오프·노조활동 보장은 들어줄 수 없다고 한다"며 "대한민국에서 노동자들의 노조할 권리는 언제 보장되는 거냐"고 되물었다.

김씨 물음처럼 이날 오후 민주노총 주최로 서울광장에서 열린 '2019 세계노동절 수도권대회' 핵심 구호는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과 "노조할 권리 보장"이었다. 주황색·빨간색·초록색 안전모를 쓴 1만여명의 건설노동자들이 광장 중앙을 꽉 채웠다. 네이버·카카오·넥슨·스마일게이트 등 IT업계 신생노조 조합원들은 노조 설립 후 처음으로 깃발을 들고 집회에 함께했다. 민주노총은 "수도권집회에 2만7천여명의 노동자들이 참석했다"고 밝혔다.

김명환 위원장은 대회사를 통해 "한국 자본가들은 ILO 핵심협약 비준이 성급하다고 아우성치고 있다"며 "한발 나아가 경영권이 위협받는다며 노조 공격권마저 요구하는 실정"이라고 비판했다. 김 위원장은 "ILO 핵심협약 비준과 온전한 노동기본권 쟁취는 더 이상 미루거나 양보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메이데이 투쟁정신을 받아안고, 탄력근로제와 최저임금제 개악을 저지하고, ILO 핵심협약 비준을 관철하고, 노조파괴법을 중단시키기 위해 총파업 깃발 아래 100만의 단결투쟁을 보여 주자"고 말했다.

노동절 축하메시지 남긴 문재인 대통령
노동자들은 "노동정책 실망스럽다"


문재인 대통령은 노동절을 맞은 이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노동존중 사회는 정부의 핵심 국정기조"라며 "노동이 자랑스러운 나라를 만들고 싶다"고 썼다.

그러나 집회에서 만난 노동자들의 생각은 달랐다. 정부 노동정책을 어떻게 평가하냐는 질문에 "실망스럽다"는 반응이 주를 이뤘다. 4년차 목수인 박정봉(가명)씨는 "정부·여당이 추진한 탄력근로제 단위기간 확대를 보고 실망했다"며 "탄력근로제 확대는 합법적으로 수당 안 주고 일을 더 많이 시키겠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서울 중구 대우조선해양 서울사무소 앞에서 현대중공업으로의 매각에 반대하며 농성 중인 금속노조 대우조선지회 조합원 김종배씨는 "배신감을 느낀다"고 격하게 반응했다. 김씨는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 1월 옥포조선소를 방문해서 조선산업 정책이 제대로 만들어지려나 기대가 많았는데 지금은 실망스럽다"며 "빙하기 때도 거대 공룡이 제일 먼저 죽었다. 세계 1·2위 기업을 묶어 몸집을 키워 놓는 것은 조선산업을 망치는 길"이라고 잘라 말했다.

박용석 민주노총 정책연구원장은 "완전히 꼬였다"고 했다. 박 원장은 대통령의 노동절 메시지에 대해 "반갑고 고맙다"면서도 "노동계 내에서 개혁 후퇴 논란이 일고, 대통령 지지도가 떨어지고, 노정갈등이 벌어지고 있는 현 상황에 대해 대통령이 직접 짚어 보고 점검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고 밝혔다.

노동자들은 '129주년 세계노동절 선언문'을 통해 "대한민국 정부는 ILO에 가입하며 약속한 핵심협약 비준을 29년째 지키지 않고 있다"며 "우리는 모든 노동자의 노동기본권이 가감 없이, 온전히 보장될 때까지 거침없이 투쟁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대회를 마친 노동자들은 "누구나 노동기본권이 보장된 세상"이라고 적힌 펼침막을 들고 행진을 시작했다. 서울광장에서 조직별로 청와대·정부서울청사·서울지방고용노동청·신세계백화점·대한상공회의소 방면으로 나눠 행진한 뒤 청운효자동주민센터 앞에서 마무리집회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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