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재훈 여행작가

칠레 산티아고 지하철 5호선 킨타 노르말(Quinta Normal)역에서 나와 큰길 하나만 건너면 ‘기억과 인권 박물관’이 나온다. 미국을 등에 업은 군부 쿠데타로 대통령궁이 폭격당하며 아옌데 정권이 무너지는 순간부터 피노체트 독재정권에 의한 탄압·구금·고문·실종이라는 아픈 기억을 거쳐 마침내 피노체트를 몰아낸 저항의 기억까지. 20년 가까운 칠레 현대사의 기억들이 꼼꼼히, 그리고 역동적으로 기록된 역사적 공간이다. 박물관에서 가장 인상적인 전시물은 1층부터 3층까지 이어지는 박물관 한쪽 벽면 전체를 빼곡히 채우고 있는 사진들이다. 피노체트 독재 시절 실종되거나 죽음으로 내몰린 이들의 흑백사진. 이 사진 혹은 사람들의 벽은 박물관이 무엇을 기억하고자 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사진을 마주 볼 수 있게 중간층에 마련된 투명한 추모공간에 앉은 이들은 한동안 그곳에 앉아 사진 속 얼굴들을 말없이 훑어보게 된다. 또 하나 놓쳐서는 안 될 전시물은 미국을 등에 업은 피노체트 쿠데타에 의해 폭격당하던 대통령궁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노동자·농민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보여 줬던 대통령 아옌데의 라디오 연설과 다큐 영상이다. “칠레 만세! 민중 만세! 노동자 만세!” 결국 유언이 돼 버린 그의 떨리는 목소리 앞에서 누구든 가슴이 무너져 내리고 만다.

박물관을 나와 다시 지하철을 타고 세 정거장만 가면 같은 5호선 라인에 있는 ‘아르마스광장’역에 이른다. 아르마스광장은 산티아고 여행이 시작되는 곳이기도 하다. 광장 주변으로는 스페인 식민지 시대에 세워진 건물들이 모여 있다. 대성당을 비롯해 지금은 박물관으로 이용되는 옛 우체국 건물. 광장에서 북쪽으로 한 블록 위에 있는 수산시장에 들러 감자와 토마토·생선 살을 넣어 끓인 칠레 해물탕 칼디요 데 콩그리오(Caldillo de Congrio) 한 그릇으로 끼니를 해결할 수도 있다. 광장에서 방향을 남쪽으로 틀어 한 블록 내려오면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 동상과 그가 마지막 순간을 보냈던 대통령궁 ‘모네다 궁전’이 나온다. 기억과 인권 박물관에서 들었던 아옌데의 마지막 절규를 잠시 떠올려 본다. 여기까지 오고 보니 짧지만 똑 부러지게 식민지 시대부터 현대 칠레의 역사까지 훑어 내려온 셈이 됐다.

이번에는 모네다역에서 1호선 지하철을 타고 세 정거장을 가서 칠레 가톨릭대역에서 내린다. 이곳은 서울의 홍대입구 같은 핫 플레이스인 라스타리아 거리. 홍대 거리를 떠올리게는 하지만 그만큼 번잡하면서 소비적이지는 않고, 딱 한눈에 들어오는 규모의 골목이다. 앞뒤로 연결된 길목에는 음반가게나 책방이 여럿 눈에 띄는 것도 이채롭다. 칠레 가톨릭대와 아트센터, 산타루시아언덕 사이에 위치한 이 골목에서는 밤마다 벼룩시장이 펼쳐진다. 해질녘부터 서너 시간 반짝 열리는 것도 벼룩 같고, 그 규모도 벼룩 같은 데다, 파는 물건도 그리 대단한 것들이 아니라 벼룩시장이란 이름에 딱 맞춤인 곳이다. 벼룩들이 자리를 편 사이사이, 목 좋은 곳을 차지한 몇몇 거리의 음악가들이 풀어내는 소리가 시원한 밤바람에 실려 골목을 애잔하게 채워 낸다. 운이 좋으면 그라피티 작업 중인 젊은 예술가들을 만나거나, 문화센터 앞 공터에서 케이팝 댄스 연습에 빠져 있는 10대들과 마주칠 수도 있다. 이 정도까지 돌았다면 해가 져도 진작에 졌을 테니 숙소로 돌아가 맥주 한 잔에 휴식을 취하는 게 현명하다. 내일은 또 내일의 여행이 뜨니까.

내일은 아침부터 서둘러 지하철을 타야 한다. 1호선을 타고 한 정거장 가서 4호선으로 갈아타고 종점까지 가야 하는 먼 길이다. 종점 근처에 있는 ‘콘차 이 토로 와이너리 투어’에 참가할 계획이니까. 우리나라에도 제법 알려진 대표적인 칠레 와인 ‘디아블로’를 생산하는 곳이다. 세계 어디를 가도 우리나라 지하철처럼 촘촘하고, 환승이 쉽고, 에스컬레이터와 엘리베이터가 필요한 곳에 딱딱 설치된 곳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칙칙하고 때로는 지린내까지 나는 유럽의 여느 지하철들과는 달리 분위기도 밝은 데다 쾌적한 공짜 화장실 아이템도 적절하게 장착한 것이 더할 나위가 없다. 물론 이런 지하철 시스템의 화장빨이 뒷면에 가려진 구린 그늘까지 가려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지하철만큼의 만족도는 없더라도 여행자에게 지하철은 꽤 가성비 높은 여행수단이다. 게다가 거미줄망 같은 지하철 노선에서 다년간 훈련받은 한국인들에게는 그다지 어렵지도 않다. 특히 도시의 규모가 크고, 교통체증이 심한 곳일수록 그 효용성은 더 높아진다. 칠레 수도 산티아고의 지하철이 이런 조건에 딱 맞아떨어지니 이틀쯤 시간을 내서 지하철 여행에 도전해 보는 건 어떨까? 칠레 지하철 요금은 거리에 상관없이 700페소(1천200원) 안팎이다.

여행작가 (ecocj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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