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 집행위원회 통상담당 집행위원(오른쪽)이 9일 오후 국회를 찾아와 김학용 환경노동위원회 위원장과 얘기하고 있다. <정기훈 기자>

결국 한국 정부는 유럽연합(EU)이 제시한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을 위한 구체적인 조치 마련 시한을 빈손으로 넘겼다. EU의 압박은 높아지고 있지만 한국 정부와 ILO 핵심협약 비준을 위한 사회적 대화를 진행 중인 노사, 관련법 논의를 앞두고 있는 국회 모두 뾰족한 수가 없어 보인다. 노사는 물론 여야 간 이견이 첨예한 만큼 사회적 합의는 물론 국회 논의도 쉽지 않다. 보수야당은 법안 통과에 의지가 없다. 관심 대상도 아니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관계자는 “4월 임시국회에서 ILO 핵심협약 비준 논의가 공론화하는 순간 탄력적 근로시간제 단위기간 확대건, 최저임금 결정체계 개편이건 모든 의제가 밀리게 될 것”이라며 “재계와 노동계가 첨예하게 맞서는 상황에서 국회 논의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말름스트룀 집행위원 “협약 언제 비준하나?”
김학용 위원장 “국내법 개정해야”


세실리아 말름스트룀 EU 집행위원회 통상담당 집행위원이 9일 오후 국회를 찾아 김학용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위원장을 만났다. 말름스트룀 집행위원은 김 위원장에게 ILO 설립 100주년 세계총회가 있는 6월을 감안해 여름 전 핵심협약 비준 가능성이 있는지 물었다. 그는 “오늘(9일) 오전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 등을 만나 한국 정부가 (ILO 핵심협약 비준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경제사회노동위원회 논의 진전과 국회 상황을 들었다”며 “하지만 (환노위) 위원장께서 직접 어떻게 전망하고 있는지, (ILO 핵심협약 비준의) 기준 시한을 직접 만나 뵙고 듣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국회 논의에) 어려움이 있는 것으로 안다”면서도 “여름 전에 비준이 완료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는지 궁금하다”며 국회 논의를 압박했다.

김학용 위원장은 “여름 전에 (협약 비준이) 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우리나라가 가진 (노사관계) 특수성이 있고, 실질적으로 ILO 핵심협약 비준 전에 국내법을 다듬어야 할 문제가 많다”며 “여름 전에 통과될 수 있다고 위원장으로서 확언하기는 어렵다”고 답했다. 김 위원장은 “입법적으로 보완할 사항이 있다”며 국내법 개정이 우선임을 강조했다.

김학용 의원실 관계자는 “비공개 간담회에서 김학용 위원장은 핵심협약 비준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입장을 재차 밝히는 한편 한국과 유럽의 상황이 다름을 설명했다”며 “말름스트룀 집행위원은 ILO 핵심협약을 비준한 나라의 기업 경쟁력이 높아진 연구를 소개했다”고 전했다. 말름스트룀 집행위원은 유럽의 사례를 언급하며 한국 상황에 맞게 협약을 먼저 비준하면 된다는 뜻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노조법 개정안 4월 국회 논의테이블 오를까

한국 정부는 EU와 자유무역협정(FTA)에 ILO 핵심협약 비준 의무를 명시했다. 한-EU FTA 협정서 13장4조 ‘다자간 노동 기준과 협정’에서 양국은 결사의 자유 인정 등 ILO 핵심협약 비준을 약속한 것이다. 국회는 2011년 한-EU FTA 비준동의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그로부터 8년이 지난 현재까지 여야 정쟁 속에 ILO 핵심협약 비준을 위한 제대로 된 국회 논의조차 시작하지 못했다.

국제사회의 압박이 거세지고 있지만 이를 위한 국내법 개정은 쉽지 않은 상황이다. 지난해 12월 한정애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단결권 보장을 중심으로 한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김학용 위원장은 재계가 제시한 5가지 입법요구 중 하나인 단체협약 유효기간 확대(현행 2년→3년)를 담은 노조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ILO 핵심협약 비준을 위한 국회 노조법 개정 논의를 염두에 둔 것이다.

정부는 ILO 설립 100주년 세계총회가 열리는 6월 전에 핵심협약 비준을 목표로 삼고 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여야정이 합의한 탄력근로제 단위기간 확대조차 3월 임시국회를 통과하지 못한 채 4월로 넘어온 데다, 정부가 추진 중인 최저임금 결정체계 개편도 국회 논의를 기다리고 있다. 여기에 청와대 장관 임명 강행과 추가경정예산안을 두고 여야가 팽팽히 맞서면서 4월 임시국회 일정조차 잡히지 않고 있다.

환노위 관계자는 “내년 총선을 앞두고 노사 입장차가 첨예한 ILO 핵심협약 비준 문제를 매듭짓기에는 여야 모두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며 “국회 논의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정미 정의당 대표는 이날 오전 당 의원총회에서 ILO 핵심협약 관련 법 개정에 앞서 비준부터 하라고 촉구했다. 그는 “ILO 핵심협약은 노동 3권을 보장한 우리 헌법의 내용과 다르지 않기에 먼저 비준해도 무리가 없다”며 “헌법 60조에 따라 국회 동의권을 가진다 해도 제반법률이 완비돼야만 비준동의안을 처리할 수 있다는 선례가 없고, 생물다양성 협약인 나고야 의정서 국회비준동의안 역시 법률정비 없이 본회의에서 먼저 통과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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