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지원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원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가 논란이다. 지난주 국민연금이 대한항공 주주총회에서 재벌 갑질의 상징이 된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대한항공 사내이사 연임을 막은 것이 계기였다. 국민연금의 정당한 주주권 행사를 오랫동안 주장한 개혁성향 시민단체들은 스튜어드십 코드 정착 과정이라며 긍정적 평가를 내렸고, 대한항공에 민주노조를 조직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인 민주노총은 환영을 표했다. 반대로 국가기관의 민간기업 경영권 개입을 반대했던 보수진영은 ‘연금사회주의’라며 국민연금을 강하게 비난했다. 그런데 필자는 이번 사태에 대한 긍정적 평가·환영·비난, 이 모두에 동의하지 않는다.

먼저 보수진영의 연금사회주의론은 나가도 너무 나간 주장이다. 연금사회주의 정도의 말이 나오려면 연금 납부자인 노동자들이 나서야 한다. 정부단체나 사용자단체가 연기금을 이용해 기업들을 국유화할 리는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러려면 노동자들이 자신의 퇴직 후 소득을 이용해 기업들을 통제하겠다고 나설 정도로 급진적·도전적이어야 한다. 또한 노동조합이 퇴직자와 재직자 간 또는 재직자 사이 이해관계를 조정할 정도로 강하게 조직돼 있어야 한다. 필자는 이런 상황을 바라긴 하지만 현재는 언감생심일 뿐이다. 노조 조직률은 10% 남짓이고, 퇴직자는 아예 조직돼 있지도 않다. 이념적 지향 역시 경제적 이익을 넘어서는 급진성을 찾기 어렵다. 국민연금이 온갖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조씨 일가의 등기이사 선임에 반대했다고 연금사회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마치 빨간색 점퍼를 보고 자유한국당을 좌파정당으로 규정하는 것만큼 허황되다.

다음으로 개혁진영의 스튜어드십 코드는 노동자에게 중장기적으로 이득이 되지 않는 정책이다. 스튜어드십 코드는 기관투자자가 배당이익이나 매매차익만 노리는 것이 아니라 기업 지배구조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자는 취지의 행동규범이다. 소버린이나 엘리엇 같은 국제 사모펀드들이 국내 대기업에 자신이 추천한 이사를 선임하라고 요구하는 것과 기본 원리는 같다. 연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는 중장기적 기업 가치나, 사회적 가치를 고려한다는 정도가 차이다. 실제 대한항공에서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는 이 정도 가이드라인에서 이뤄졌다. 하지만 이런 주주권 행사가 중장기적으로 노동자에게 이득인 것은 아니다.

주주와 노동자 간의 윈-윈게임은 제한적 조건에서만 성립한다. 기업이 잘 돌아갈 때는 주주와 노동자의 이해가 동시에 만족될 수도 있다. 하지만 기업이 잘 돌아가지 않을 때는 둘의 이해관계가 충돌한다. 수익성 낮은 사업을 구조조정하고, 노동자의 임금인상을 억제해야 주식가치가 올라가기 때문이다. 한번 이런 상황을 가정해 보자. 거시적 장기침체에 대비하기 위해 경영진이 10년 동안 사외유출(배당)을 막고, 고용유지를 위해 아예 손해까지 감수하겠다고 판단하면 어떨까? 기관투자자는 어떤 결정을 해야 할까? 아마도 재벌 총수의 사익추구를 비판하는 논리와 비슷하게 주주이익을 침해하는 노사 담합이라고 비판할 것이다. 주주와 노동자의 행복한 동거는 호황 때나 가능하다. 장기침체가 예정된 한국 사회에서는 기대할 것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민주노총의 주주행동주의에 기댄 행동은 단기적으로는 속 시원할지 몰라도 중장기적으로는 큰 손해다. 단적인 예로 이번 대한항공 주주총회에서 경영진과 대립한 주주는 국민연금만이 아니라 구조조정을 요구하는 민간 사모펀드도 있었다. 이들은 지분을 인수한 후 그럴듯한 명분을 만들어 경영진과 대립한 투기자본이었다. 사모펀드가 재벌개혁을 내걸고 배당을 압박하는 사례가 최근 많이 발생한다. 엘리엇이 삼성전자 경영권 승계를 물고 늘어진 후 고액 배당을 받아 챙긴 것이 대표적 사례다. 그런데 경영진이 주주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노력해도 결국 이익을 만들어내야 하는 건 노동자 몫이다. 이익이 많이 나는 상황이면 그래도 낫지만, 반대 상황이면 노동자의 희생이 장기간 필요해진다.

조양호 회장이 악이라고 다른 주주들이 선인 것은 아니다. 때로는 주주들은 자신의 손에 직접 피를 묻히지 않기 때문에 더욱 가혹하게 노동자들의 피를 요구하기도 한다. 사회적 가치를 가져다 붙이더라도 주주행동주의 맥락에서 국민연금은 사모펀드와 근본적으로 다를 수 없다. 주주행동주의를 촉구해 재벌 총수를 잡겠다는 것은 노동자가 제 스스로 무덤을 파는 행동이다. 국민연금도 이번 주총에서와 같은 논리로 얼마든지 구조조정을 요구할 수 있다.

재벌개혁의 논쟁 지형에서는 보수의 거짓 선동과 개혁의 위선적 정책이 항상 부딪힌다. 그리고 노동은 모순된 행동을 종종 한다. 보수진영은 재벌총수 사익을 위해 재벌개혁을 사회주의 정책으로 호도하고, 개혁진영은 주주를 위한 주주에 의한 개혁을 시민을 위한 시민에 의한 개혁으로 포장한다. 노동계는 개혁진영의 의제를 받아들여 주주에게 재벌 총수를 공격하라는 모순적 요구를 하거나, 결과적으로 보수진영과 같은 맥락이 되는, 노동자 전체의 임금 격차를 축소하기보다 재벌 총수와 이익을 나눠 임금격차를 키우는 임금인상 전략을 택하기도 한다.

그야말로 대혼란이다. 대한항공 주주총회는 이런 혼란을 극단적으로 보여 줬다. 조 회장이 이사직에 오르지 못했다고 좋아할 일이 아니다. 노동자운동에 필요한 것은 주주와의 동맹이 아니라 스스로의 실력으로 재벌을 통제하고, 생산을 재조직하는 투쟁이다. 어렵더라도 그리 가야 노동자계급에 유리한 재벌개혁의 길이 열린다.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원 (jwhan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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