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형탁 마실지역사회연구소 이사장

관계란 서로 의미가 있는 사람·사물·단체 사이의 질서 또는 규칙(rule)이다. 이 규칙에 늘 따라다니는 문제가 공정함(fairness)이다. 노사관계라 하든 아니면 고용관계라 표현하든 이 관계에도 늘 공정의 문제, 즉 정의(justice)의 문제가 등장한다.

이 정의의 문제는 옛날부터 많은 철학자들을 고민하게 했던 주제다. 다양한 철학자들의 주장을 소개하는 것은 생략하고 직관적으로 와 닿을 수 있는 두 가지를 이야기하고 싶다. 그리스·로마신화에는 많은 신들이 있는데, 그중에 정의의 여신이 있다. 정의의 신이 여신이라는 것도 흥미롭지만, 정의의 여신의 형상은 더욱 이채롭다. 정의의 여신은 앞을 보지 못한다. 눈을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손에는 평형 저울을 들고 또 다른 한 손에는 칼을 들고 있다. 앞을 가려 사사로운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겠다는 엄정함, 또 공평성에 어긋나면 칼로 단죄하겠다는 단호함을 상징한다.

고대 서양에서 정의의 상징이 이러했다면 동양에서는 어떠했을까. 공자는 다스린다(政)는 것은 바르게(正) 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 바를 정자 다섯 획을 뜯어 살펴보면 흥미로운 해석이 가능하다. 위에는 하늘이 있고 아래에는 땅이 있는데 그 중간에 사람, 즉 인간 세계가 있다. 오른쪽 높은 곳에 있는 선은 누워 있고, 왼쪽 아래 있는 선은 세워져 있다. 권력과 돈이 많은 사람, 많이 배운 사람은 스스로를 겸손하게 낮추고 권력도 없고 돈도 없고 배우지 못한 사람은 서서 그 기운을 북돋우는 형상이다. 스스로 어려우니 그 바름을 실현하게 하는 것이 정치다.

정부는 집행관의 권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 바름을 실현하는 핵심이다. 그런데 바름을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대등한 권리 주체들 사이에서 중립적인 태도로 거래를 성사시키는 것으로 그 역할을 상정하고 있는 듯한 모습을 많이 본다. 현실 사회에서는 운동장 자체가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법적으로 동등한 계약 권리주체를 상정해 정치를 하겠다는 것은 정치를 포기하는 것과 같다.

사회적 대화를 표방하고 있기에 경제사회노동위원회는 이 사회의 바름을 실현하는 가장 모범적인 기구가 돼야 한다. 기울어진 운동장을 연구하고 해법을 찾는 장이 돼야 한다. 그러나 최근 탄력적 근로시간제 논의를 보면 사회적 대화의 장이 아니라 단체교섭 현장을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경사노위가 제대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신뢰 프로세스가 가동돼야 한다. 신뢰가 쌓이기 위해서는 우선 서로가 공감하고 합의가 가능한 의제부터 시작하는 것이 옳다. 골치 아픈 숙제를 떠넘기는 곳으로 경사노위를 바라보고, 의례적 통과 절차의 과정으로 활용한다면 전례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 90%의 노동자가 노동조합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또 단체협약 적용에서 제외돼 있다. 90%에 이르는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담아 낼 기구도 없고, 또 논의할 장도 없다. 그러니 사회적 대화를 한다면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는 이미 정해진 바나 다름 없다. 그런데도 자신의 대표기구가 없어 가장 불리한 조건에 있는 노동자들에게 그 피해가 갈 내용을 우선 의제로 내놓고 합의를 하자고 하면 그 존재 의의를 부정당할 수밖에 없다.

디지털 경제로의 전환에 따라 산업 구조의 변화는 물론이고 노동의 성격 자체가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다. 이 사회가 어떻게 변화해 나갈지에 대해 누구도 쉽게 예측할 수 없기에 여러 가지 가능한 시나리오를 만들고 말 그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어떠한 시나리오를 선택할지 논의하는 일이 가장 시급하다. 그 시나리오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사회의 각 구성 주체들이 어떻게 노력해야 할지 방안을 내놓고 또 한 번 말 그대로 ‘사회적’ 대화를 하는 일이야말로 긴급한 임무다.

이번 상황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앞선다. 실패에서 배우는 것이 왜 이렇게 어려울까. 조금 못 미치더라도 힘을 모아서 더 큰 일을 해 보자고 마음을 모으는 것이 세상이 나아지는 길일 터인데, 대체 노사문제에서만큼은 어찌 그리 훌륭한 사람들도 정작 모아 놓으면 나쁜 수를 선택하게 되는지 모르겠다. 제대로 된 사회적 대화를 꼭 한 번 보고 싶은 사람이기에 더 화가 나는지도 모르겠다.

마실지역사회연구소 이사장 (htkim8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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