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수호 전태일재단 이사장

내가 사람으로 태어나 살면서 첫 기억은 경북 달성군 가창면 행정리에서 시작한다. 국민학교(현재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이었다. 마을 어귀에 500년도 더 된 큰 은행나무가 있어 마을 이름을 그렇게 붙였다 한다. 마을 사람들은 이 은행나무를 마을을 지켜 주는 수호신으로 여겨 신령스럽게 모시고 있었다. 우리 꼬맹이들이 팔을 벌리고 손을 잡고 대여섯 명이 둘러서도 손이 잘 안 잡힐 정도였다.

그 큰 덩치에 오색실로 엮은 금줄이 둘러쳐져 바람에 날리고 있었는데, 그 앞에는 살평상이 놓여 있어 여름에는 어른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언성을 높이며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정월 대보름이면 마을 어른들은 이 은행나무 앞에 음식을 차려 놓고 당제를 지내곤 했는데 쥐불놀이에 지친 우리 꼬맹이들은 때맞춰 그곳으로 몰려가곤 했다. 어른들이 울긋불긋 옷을 차려입고 꽹과리에 장구며 북에 징까지 울리며 농악을 치는 것도 구경할 만했지만 제사가 끝나면 나눠 주는 먹을거리에 더 마음이 가 있었다. 팥고물이 넉넉한 시루떡도 좋았지만 고소한 기름내 풍기는 여러 전 쪼가리가 훨씬 맛있었다.

우리는 이게 다 은행나무 덕이라 생각하며 고마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은행나무는 너무도 당당하게 서서 마을을 지켜 주고 우리에겐 맛난 것을 골고루 나눠 줬다. 60년도 더 전 일인데 지금도 그러고 있는지 모르겠다.

내가 군에서 제대하자마자 발령을 받아 간 곳이 경북 울진군 근남면 장평리 제동중학교였다. 스물일곱 나이였지만 철이 다 들었다고 생각했었다. 1974년 10월31일에 제대를 하고 11월1일 부임을 했는데 세 학급짜리 신설 중학교였다. 교장까지 합해 6~7명의 교사가 근무하고 있었다. 날을 미리 받아 놓았기에 11월9일 대구까지 가서 결혼식을 했는데 토요일이었고 나는 다음 월요일부터 바로 출근을 했다. 신설 중학교라 1학년 200여명의 학생밖에 없었는데 나는 그래야 된다고 판단했다.

스물다섯 살 아내에게는 공기도 좋고 경치도 좋은 시골이니 신혼여행 좀 길게 한다 생각하고 가자고 설득했던 것 같다. 그렇게 시작한 나의 첫 교단생활은 온통 학교와 학생뿐이었다. 남편 하나만 바라고 그 먼 시골까지 온 아내는 혼자 집을 지키며 선뜻 마음을 잡지 못하고 힘들고 혼란스러웠을 듯했다.

그러던 어느 주말 우리는 큰마음을 내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불영사에 놀러 갔다. 모처럼 둘이 호젓한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왕피천을 따라 불영계곡을 오르다 보면 거기 맞춤한 곳에 아주 오래된 절인 불영사가 있었다. 계곡을 지나 소나무숲길을 한참 올라가면 하늘이 열리며 절집이 보였다.

그런데 아내 눈에는 그 기와보다는 샛노랗게 물든 은행잎이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하늘거리는 큰 은행나무가 먼저 보였다. 이미 다른 활엽수는 잎이 다 진 늦가을이었는데 그 큰 은행나무 노란 잎만은 수천수만이 반짝이며 우리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있었다. 그리고 아무리 힘들더라도 더 큰 용기와 힘을 내라고 격려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이곳저곳 돌아보며 사진도 찍고 물이 잘든 은행잎을 주워 손가락에 끼워도 보며 해 가는 줄 모르고 재미있게 놀았다. 그 뒤 내 삶이 힘들고 형편이 어려울 땐 이 은행나무를 떠올리며 위로를 받고 힘을 얻었다.

2005년 가을 민주노총 위원장이었던 나는 조직 내 불의의 사고로 사퇴할 수밖에 없었다. 사퇴 결심을 알리자 우리 임원들이 나와 운명을 같이하겠다며 총사퇴를 결의했다. 말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총사퇴를 결행하는 기자회견을 마치고 우리는 사무실을 나섰다. 막막했다. 우리는 승합차에 같이 타고 동해를 향해 달렸다. 같이 울분도 삭이고 머리도 식히기 위해서였다. 나는 불영계곡 쪽으로 차를 몰게 했다. 가는 길에 먼저 불영사에 들러 보고 싶었다.

계곡도 산도 소나무숲길도 그대로였다. 말없이 나를 따라오던 임원들과 같이 산모퉁이를 돌아들자 눈앞에 갑자기 수없이 많은 노란 손수건이 휘날리고 있었다. 아 그 은행나무였다. 서로 말은 없었지만 스스로를 돌아보며 조금은 더 넉넉하고 새로운 생각을 하는 계기가 됐던 것 같다.

전태일재단 이사장 (president110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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