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류현철 직업환경의학전문의(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결국 지난 19일 경제사회노동위원회에서 탄력근로제 적용기간을 6개월로 확대하는 것에 노사정이 합의했다. 그러고는 겸연쩍었던지 노동자들의 건강권 보호와 임금보전 대책도 합의했다고 밝혔다. 사용자가 임금 저하 방지를 위한 보전수당 지급이나 할증률 조정 등 임금보전 방안을 마련해 고용노동부 장관에게 신고하는 장치를 마련했다는 것이다. 애초 장시간 노동 문제는 노동자들의 건강·안전과 결부된 문제였다. 노동시간을 연간 1천800시간대로 단축하겠다는 정부의 공약 달성은 돈 때문에 장시간 노동을 해야만 하는 사회구조와 인식을 바꾸지 않고서는 불가능할진대 또다시 건강권과 돈의 문제를 결부시킨다.

노동자들의 건강권 보호를 위해서 3개월 이상 탄력근로 적용시에 11시간 연속휴식을 의무화하고 노사정이 함께 과로방지 대책을 마련하기로 합의했다고도 한다. 병 주고 약 주기일까? 애초 노동시간의 변칙적인 연장을 허용하지 않으면 됐을 일이다. 과로의 길을 열어 주면서 과로방지 대책을 내놓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하루 노동시간을 줄이고 전체 노동시간을 줄이는 것만이 과로로부터 노동자들의 건강을 지키는 길이다.

사회적 합의의 이름으로 탄력근로제가 확대되는 동안 정부 입장은 어땠을까? 근로기준법 개정을 통해 주당 노동시간이 최대 68시간에서 52시간으로 줄어들게 되자 기업은 불평하기 시작했고 이를 달래려는 듯 지난해 10월 경제부총리가 경제관계장관회의에서 탄력근로제 단위기간 확대 이야기를 꺼냈다. 새로 바뀐 경제부총리도 지난해 말 ‘2019년 경제정책 방향’을 설명하며 탄력근로제 단위기간 확대를 2019년 2월까지 마무리하도록 최대한 노력하겠다고 했다.

거기 발맞춘 것일까. 경사노위 합의가 이뤄지기도 전인 지난 1월 노동부 수시정책연구과제로 ‘뇌심혈관계질환 재해조사 등 개선방안 연구’ 입찰이 공고됐다. 연구제안 요청에는 “현행 뇌심혈관계질환 인정기준의 발병 전 12주 단위기간인 만성과로 판단의 기준기간을 6개월(24주)로 연장하고, 1주 평균 60시간 업무시간을 초과근로시간 단위로 변경하는 타당성 연구”를 목적으로 한다고 밝히고 있다. 물론 이미 산재보상 정책에 있어서 산재 인정기준 및 관련 제도에 대해서 수시로 새로운 연구나 제안을 반영하겠다고 밝힌 바 있으며 뇌심혈관계질환 인정에 있어서 만성과로 기준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있었다는 것도 안다.

하나 오이밭에서 신발을 고쳐 신지 말고 오얏나무 아래서는 갓끈을 고쳐 매지 마라고 했다. 비록 필자의 경험이 많지는 않으나 정부정책연구 제안 요청서에서 연구목적을 통해서 이렇게 기준기간(6개월)과 인정기준 산정방식 변경(초과근로시간)을 구체적으로 제시해 타당성을 검토하라는 경우는 흔치 않다. ‘만성과로기준에 대한 해외사례 검토 및 최근 연구 성과 반영’ 정도라면 모를까 이런 구체적인 기준을 제시하고 있으니 신발을 고쳐 신고 갓끈을 고쳐 매는 연유를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혹시라도 3개월을 기준으로 주 평균 60시간 이상의 업무를 수행하는 경우 뇌심혈관질환의 업무관련성을 인정하는 기존 지침을 들어 탄력근로제 확대는 제도적으로 ‘과로사’를 조장하는 것이라는 타당한 지적을 피해 갈 묘책을 궁리한 것이라면 고용만이 아니라 어엿이 노동이라는 이름이 들어간 부서에서 할 도리는 아니다. 고용부가 아닌 노동부의 이름으로 당당하게 ‘탄력근로제 적용기간 확대는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우리나라 노동자들의 안전과 건강을 위협하는 것이므로 동의할 수 없다’고 해 줄 수는 없었을까?

정부는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을 다투고 과로사와 과로자살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의 입장이 아니라 기업 입장을 대변했다. 근로기준법 개정으로 노동시간이 줄게 생겼다지만 2017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에 따르면 독일의 연간 노동시간은 1천356시간, 프랑스는 1천514시간이며 우리나라는 2천24시간이다. 해당 통계에서 연간 2천시간 이상을 일하는 나라는 멕시코·코스타리카와 한국 세 나라뿐이다. 주 40시간으로 환산하면 독일 노동자들에 비해 우리나라 노동자들은 무려 16.7주, 넉 달을 더 일한다. 이런 현실을 외면하고 기업측에서는 독일이나 프랑스에서 탄력근로제 단위기간을 1년까지 허용하고 있다는 예를 들며 탄력근로제 기간을 1년까지 확대하자는 억지를 부렸다. 결국 탄력근로제 단위기간은 6개월로 늘리는 것으로 합의되고 제도적으로 주당 64시간 근무가 연간 최대 40주까지 가능하다.

탄력근로제 적용 기간 확대는 틀림없이 노동조합이 없거나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기 어려운 노동자들의 건강 악화로 귀결될 것이다. 여러 번 밝혔다시피 탄력근로제 문제는 차별의 문제다. 장시간 노동에 허덕이게 될 대상이 누구인지, 유연근로시간제·탄력근로제라는 이름으로 성수기에는 혹사당하고 비수기에는 저임금과 고용불안에 시달리게 될 대상이 누구인지 뻔히 보이는 정책을 합의하고 서푼짜리 남용방지 대책을 내놓는 것은 사회적 합의의 이름으로 차별을 자행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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