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제성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1차 세계대전은 이전의 전쟁과 다르다. 이전의 전쟁은 교전국들이 갖고 있는 인적 자원과 물적 자원의 일부만을 동원하는 것이었다. 전쟁은 전선에서만 치러졌고 후방은 일상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1차 대전은 전선과 후방의 구분을 없앴다. 국가는 군수를 생산해 하루 24시간 내내 전선으로 보급하는 거대한 공장으로 변신했으며, 국가 구성원들은 그 공장에서 일사불란하게 일하는 노동자 겸 병사로 변신을 강요당했다. 노동자와 병사를 동일시하는 산업역군이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여기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전선은 이렇게 보급되는 자원을 피비린내 속에서 기계적으로 소비하는 시장의 역할을 수행했다.

전쟁에 참전했던 독일 작가 에른스트 윙거는 이것을 총동원이라고 불렀다. 총동원은 이후 전쟁의 기본 양식이 됐지만 전쟁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국가가 설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모든 인적·물적 자원을 동원하는 체제는 언제나 총동원 체제이며, 이것이 곧 전체주의 체제의 기본 특징이다.

국가가 있는 자리에 시장이 들어서면 시장전체주의 체제가 된다. 이것은 시장의 목적인 이윤 극대화를 위해 사회의 모든 인적·물적 자원이 총동원되는 체제를 말한다. 총동원 체제에서 모든 존재는 에너지로 간주된다. 이것은 현대 기술 문명의 특징이다.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에 따르면 기술의 본질은 자연의 존재양식을 드러내는 것인데, 현대 기술은 단순히 드러내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도록 닦아세우는 데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물레방아는 물의 힘으로 돌아가며 흐르는 물에 전적으로 자신을 맡긴다. 물레방아는 흐르는 물의 에너지를 저장하기 위한 기술이 아니다. 하지만 4대강 댐은 강을 수력 저장고로 취급한다. 그리고 강으로 하여금 에너지를 드러내도록 닦아세운다. 댐이 강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강이 댐에 의해 갇히고 저장되고 채굴된다. 물레방아는 강을 강으로 대접하지만 4대강 댐은 강을 수자원 공급처로만 취급한다.

마찬가지로 현대 기술 문명은 인간을 인간으로 대접하는 것이 아니라 계산할 수 있고 동원할 수 있는 생체에너지 공급처로 취급한다.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에서 동원하는 것은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전기에너지 같은 수준에서 취급되는 순수한 의미에서의 노동에너지일 뿐이다. 노동자는 노동하는 인간이 아니라 마치 천연자원과 유사하게 채굴할 수 있는 인적 자원으로 취급된다. 인간을 사물로 환원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인간으로부터 생각할 수 있는 힘을 박탈해야 한다. 생각하는 능력이야말로 인간과 사물을 가르는 가장 결정적인 기준이기 때문이다. 이미 19세기 미국 경영학자 테일러는 이렇게 말했다. “노동자는 생각할 필요가 없다. 생각은 경영진이 하는 것이다. 노동자는 경영진의 구상을 실행하기만 하면 된다.” 총동원 체제는 테일러의 아이디어를 국가 전체 조직 원리로 확대한 것이다.

테일러주의는 1차 대전을 통해 자신의 효율성을 입증했고, 1차 대전은 테일러주의를 평화 상태의 조직 원리로 확대시켰다. 테일러주의는 노동을 시간 단위로 측정된 일련의 동작으로 환원함으로써 노동자에게 생각을 금지했다. 그런 점에서 테일러주의는 가장 본질적인 수준에서 노동의 비인간화를 실현하는 원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1차 대전 이후 진보 세력은 테일러주의를 "과학적" 노동조직 원리로 받아들였다. 그것은 과학이기 때문에 좋고 싫음의 문제를 떠난 것이 됐다. 왜냐하면 합리적 근대인을 자처하는 자에게 과학은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것과 같이 호불호의 문제가 아니라 필연의 문제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남은 과제는 노동의 비인간화가 초래하는 폐해를 최대한 시정하는 것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인도주의적 과제는 기본적으로 노동의 영역 바깥에서만 이뤄졌을 뿐이다. 그리고 노동 그 자체는 여전히 과학이 지배한다고 간주되는 비인간적인 체제에 남아 있었다. 진정으로 인간적인 노동체제를 재해석하는 문제가 중요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jeseongpark@kli.r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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