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안 화력발전소 비정규직 고 김용균씨 민주사회장이 지난 9일 치러졌다. 고인은 경기도 남양주시 모란공원에 안치됐다. 부친 김해기씨가 아들 유골을 안치하고 있다. <제정남 기자>

청년 김용균이 열사들에게 인사했다.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 최종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에 항거해 몸을 불사른 택시노동자 허세욱, 인권변호사 조영래 곁을 지나갔다. 전태일 열사 오른쪽 뒤편에 자리 잡은 그를 아버지 김해기씨와 어머니 김미숙씨가 한참 바라봤다.

태안 화력발전소 비정규직 고 김용균씨의 하관식이 거행된 지난 9일 오후 경기도 남양주시 모란공원. 하루 햇살을 거쳐 갔을 텐데도 묘역 곳곳에 내려앉은 서리는 기운이 생생했다. 이상진 민주노총 부위원장이 김씨가 쉴 장지를 살피며 말했다. "그래도 용균이가 묻힐 곳은 볕이 잘 드는 곳이라 다행이네."

태안 화력발전소 비정규직 모란공원에 잠들다

유족과 청년비정규직 고 김용균 노동자 민주사회장 장례위원회는 이날 오후 경기도 고양시 벽제서울시립승화원에서 화장한 고인의 유골을 모란공원에 안치했다. 앞에는 전태일 열사가 자리했다. 고인과 함께 일했던 태안 화력발전소 동료들이 유골함 위로 흙을 덮는 장례절차인 취토를 했다. 묘지 옆에 선 고인의 이모부가 동료들의 손을 하나하나 잡았다. "자주 보러 올게. 함께한 시간이 너무 짧았다." 한 동료가 울먹였다.

공공운수노조 한국발전기술지부 태안지회 깃발이 고인과 함께 묻혔다. 죽은 김용균의 유지를 이어받겠다는 동료들의 뜻을 담았다. 김씨의 첫 제사. 김해기·김미숙씨가 먼저 간 아들 앞에 머리를 숙였다. 하관식 사회를 맡은 박성호 전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장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제는 시간에 쫓겨 컵라면 먹지 않아도 되는 편안한 곳으로 가소서."

살아남은 자들은 고인 앞에 다짐했다. 최준식 공공운수노조 위원장은 마지막 조사에서 "김용균 동지에게 큰 빚을 지고 말았다"며 "아들과 같은 죽음을 막고자 싸웠던 어머님이 외롭지 않도록 우리 모두 '내가 김용균이다'라는 마음을 가지고 함께하자"고 말했다.

태안 화력발전소 비정규직 고 김용균씨의 장례가 숨진 지 62일 만인 지난 9일 치러졌다. 장례위원회가 민주사회장으로 장례를 준비했다. 이날 오전 김씨의 영정과 위패가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2호실을 떠났다. 장례식장을 지켰던 시민대책위 관계자들이 복도에 줄지어 서서 고인을 배웅했다. 김씨와 같은 나이의 친구이자 외사촌인 황성민(25)씨가 영정을, 이준석 노조 한국발전기술지부 태안지회장이 위패를 안았다. 모친 김미숙씨는 손수건을 눈에서 떼지 못한 채 아들 사진 뒤를 따랐다.

고인이 누운 관이 공공운수노조 깃발로 감싼 채 식장 밖으로 나왔다. "용균아 너 없이 어떻게 사니." 모친이 울부짖었다. 여기저기서 눈물이 쏟아졌다. 운구차에 실린 고인은 마지막 여행길에 올랐다.
 

▲  지난 9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고 김용균씨 민주사회장이 치러졌다. 고인의 어머니 김미숙씨가 참았던 눈물을 쏟았다. <정기훈 기자>

또 다른 김용균 여전히 발전소 돌리는데
"차별 없는 세상 만들자" 한목소리


두 달여 만에 도착한 태안 화력발전소는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높이 솟은 굴뚝은 쉼 없이 연기를 토해 냈다. 또 다른 김용균이 발전소를 돌리고 있으리라. 운구행렬은 고인이 생전 일했던 9·10호기 앞에 멈췄다. 아침 해가 떠오를 즈음 노제가 시작됐다.

김용균보다 4개월여 먼저 입사한 동료 김선호씨가 편지를 낭독했다. 그는 "용균이 어머님은 사고 이후 저희를 끌어안으며 열악하고 위험한 이곳에서 어서 나가라고 말한 뒤 외로운 싸움을 시작하셨다"며 "저희보다 앞장선 어머님이 큰 힘이 돼 주셨다"고 감사인사를 했다.

다짐이 이어졌다. 박태환 발전노조 위원장은 "아들과 같이 목숨을 잃는 일이 없게 해 달라는 부모님의 외침을 가슴 깊이 새기겠다"며 "한 사업장에서 일한 노동자들이 똑같은 대우를 받도록 원·하청 구조를 허무는 투쟁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광화문광장 영결식 참석자들 "내가 김용균이다"

용균의 한자어는 녹일 용(鎔), 고를(균등할) 균(均). 김용균은 이름 뜻대로 노동자·시민을 녹여 한데 모았다. 장례위원회는 이날 오전 서울 중구 흥국생명 남대문지점 앞에서 광화문광장까지 노제를 지냈다. 컨베이어벨트 위에서 '만납시다' 손피켓을 든 김용균을 형상화한 조형물을 앞세운 운구행렬이 이어졌다. 고인과 일했던 발전소 비정규직과 학교비정규직을 포함한 비정규 노동자들이 선두에 섰다. "우리가 김용균이다" "안전한 세상 만드는 길 지켜봐 주세요"라고 쓰인 만장이 뒤를 따랐다. 광화문 빌딩 숲 사이로 휘몰아치는 찬바람이 김용균을 배웅했다. 1천명·2천명·3천명…. 광화문광장에 가까워질수록 운구행렬이 길어졌다.

장례위에 장례위원으로 신청한 사람은 5천100여명. 광화문광장 영결식은 김용균을 잊지 않으려는 이들로 가득 찼다. 세월호 유가족과 고 이한빛 PD 가족, 스텔라데이지호 탑승자 가족 등 자식을 잃은 부모들이 유족을 위로했다.

첫 조사에 나선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은 "돈밖에 모르는 사회가 용균이를 학살시켰다"며 "땅에 묻어야 할 이는 용균이가 아니라 돈밖에 모르는 독점자본주의"라고 일갈했다. 이어 제단에 오른 김명환 민주노총 위원장이 "평등하지 않은 세상 때문에 자식을 먼저 떠나보내는 부모가 없도록 우리가 반드시 세상을 뒤엎자"고 외쳤다.

영결식 참석자들은 고인의 모친을 홀로 두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유족인사를 위해 제단에 오른 김미숙씨를 향해 참석자들은 "내가 김용균이다"를 연신 외쳤다.

"어쩔 수 없이 차가운 냉동고에 놔둘 수밖에 없던 엄마가 너한테 너무 미안하고 죄스럽구나. 언젠가 엄마 아빠가 너에게로 가게 될 때 엄마가 두 팔 벌려 너를 꼬옥 안아 주고 위로해 줄게." 김미숙씨가 아들에게 인사했다.

모란공원에 아들을 안치한 김씨가 마지막 말을 꺼냈다.

"아무것도 모르는 가정주부였는데 저와 함께해 주셔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아들은 죽었지만 우리 가슴에 계속 살아남을 겁니다. 발전소 비정규직들의 정규직 전환이 완전히 될 때까지 힘껏 싸워야 합니다. 나라 곳곳에 있는 비정규직, 이들의 문제가 해결되도록 함께 싸워야 합니다. 같이 함께해 주세요."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