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수호 전태일재단 이사장

민들레꽃은 흔하고 강해서 좋다. 보기도 예쁘거니와 쓸모도 많다. 이른 봄이면 어디서나 볼 수 있고 어떤 조건에서도 잘 자란다. 시골길·논둑·밭둑은 말할 것도 없고 공장 올라가는 언덕길에도 자라고 교도소 감방 뒤뜰에서도 핀다. 심지어 도회지 아스팔트 벌어진 틈 사이에도 노랗게 비집고 올라온다. 일제 강점기 온갖 탄압 속에서도 우리말 사전을 만들려는 선조들의 피나는 투쟁을 그린 영화 <말모이>에서도 민들레는 김판수의 초가집 문 앞 댓돌 주변에서 끈질기게 피어 있었다.

뾰족뾰족 톱날 같은 잎도 든든하고 머금었던 함박웃음을 “푸~하하” 내뱉듯 동그랗게 피는 꽃도 너무 정겹고 힘차다. 밟아 보라는 듯 웃으며 쳐다보는 얼굴에 생기가 넘친다. 꽃이 지면 그 자리에 하얀 홀씨가 생기는데, 이 홀씨들을 날려 보낼 때쯤이면 꽃대가 꼿꼿하게 선다. 홀씨를 바람에 실어 멀리 보내기 위해 최선을 다해 당당하게 서는 것이다. 놀라울 정도의 힘찬 발기다.

1989년 11월13일 전태일 기일 즈음에 나는 서울구치소에서 나왔다. 전교조 결성과 함께 끌려간 지 6개월째였다. 1심이 끝나고 나는 집행유예로 나왔으나 함께 구속됐던 윤영규 위원장은 실형을 선고받아 나오지 못했다. 오기로 감방에서 입고 있던 한복을 그대로 입고 나왔다. 마침 그날이 전태일노동상 시상하는 날이었는데, 전교조가 2회 전태일노동상을 받게 돼 나는 출소하며 바로 시상식장으로 가서 조직을 대표해서 상을 받았다. 당시 나는 감옥에 있으면서도 전교조 사무처장직을 유지하고 있었고 나오자마자 업무에 복귀한 것이다.

그해 12월 조직을 재건해 제대로 세우기 위해 총선거를 실시했다. 위원장·지부장·지회장·분회장과 대의원까지 동시에 선출하는 선거였는데 우리는 선거투쟁이라 불렀다. 이른바 불법단체(비합법 법외노조)인 전교조가 실정법을 고의로 어겨 가며 노동조합의 정당성(헌법적 권리)을 보여 주는 투쟁이었다.

나는 조합원이 가장 많은 서울지부를 맡는 게 좋겠다는 권유에 따라 서울지부장 선거에 출마했다. 젊은 후배인 고은수 선생과 맞붙게 됐는데, 본부 사무처장 출신에다 감옥에도 갔다 오고 TV 출연 등으로 그 당시 전교조의 상징처럼 돼 있어서 쉽게 이기리라 예측했다. 그래도 학교를 방문하며 선거운동을 한다거나, 합동유세 등을 통해 세를 과시하고 존재감을 높이기 위해 문화선동 중심의 유세단을 구성하는 등 후보들은 최선을 다했다. 우리 유세단에도 노래패 선생들이 있었는데 그중 한 분이 <민들레처럼>이란 노래를 너무 잘 불러 우리의 선거운동 노래를 이 노래로 하기로 했다. 학교를 방문하거나 유세를 시작할 때는 언제나 <민들레처럼>을 불렀다.

“민들레꽃처럼 살아야 한다/ 내 가슴에 피는 불타는 투혼/ 무수한 발길에 짓밟힌대도/ 민들레처럼// 모질고 모진 이 생존의 땅에/ 내가 가야 할 저 투쟁의 길에/ 온몸 부딪히며 살아야 한다/ 민들레처럼// 특별하지 않을지라도/ 결코 빛나지 않을지라도/ 흔하고 너른 들풀과 어우러져/ 거침없이 피어나는 민들레// 아아 민들레/ 뜨거운 가슴/ 수천 수백의 꽃씨가 되어/ 아아 해방의 봄을 부른다/ 민들레의 투혼으로.”

새로운 전교조를 바라는 서울 조합원들의 선택으로 나는 비록 선거에서 졌지만 서울지부를 비롯한 전교조의 선거투쟁은 멋진 승리를 거뒀다. 전교조는 새로운 지도부를 구성하면서 학교 현장에 더 깊이 뿌리 내리게 됐다. 그리고 참교육의 수많은 홀씨를 날려 보내기 시작했다. 민들레꽃처럼.

나는 99년 민주노총 사무총장으로 일하게 됐다. 그때 사무총국에 아주 젊은 활동가 몇이 있었는데 나는 그들과 특별히 가까이 지냈다. 나는 이 젊은 활동가들과 가끔 막걸리도 마시며 우리 노동운동의 새로운 미래를 구상하기도 했는데 ‘민들레 프로젝트’라 이름 붙였다. 사회적 경제를 기반으로 하는 협동조합 형태의 공유경제 구조를 만들어 자본 중심에서 탈피해 사람 중심으로 가야 극심한 노사 간의 대립이나 갈등도 해소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내용이었던 것 같다.

민들레 프로젝트라 이름 붙인 것은 내가 민들레를 무척 좋아하기도 했지만 민들레처럼 흔하면서도 아름답고 짓밟히면서 잘 자라는 그러면서도 나물이나 약재 등 쓰임도 많아, 마치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세계사 속에서 제 몫을 하며 살아온 우리 민중의 모습이어서 그랬던 것 같다. 지금은 혹한의 겨울이지만 산에 들에 길거리에 민들레는 새봄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전태일재단 이사장 (president1109@hanmail.net)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