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제성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국제노동기구(ILO) 헌장은 이렇게 천명한다. “사회정의 없이는 평화도 없다.” 산업혁명이 초래한 사회경제적 위기는 19세기 내내 서구 사회를 긴장과 갈등으로 몰아갔다. 그러나 서구는 인권과 정의에 기초한 평화적 개혁의 길을 외면하고, 위기와 갈등을 외부로 돌리는 경쟁에 골몰했다. 그 귀결이 1차 세계대전이었다. 인간이 저지르는 가장 큰 오류 중 하나는 위기를 돌파하는 방법으로 적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외부의 적을 만들어 내부의 위기를 극복하는 수단으로 삼는 것은 우리도 너무나 익숙히 경험했던 것이리라. 외부의 적이 사라지면 이제 내부에서 새로운 적을 만들어 낸다. 하지만 이렇게 끊임없이 적과 동지를 가르는 것은 결코 사회적 위기의 해법이 될 수 없다. 그런 사회 질서는 결코 오래 지속될 수 없다. 대단한 논리적 증명이 필요한 일이 아니다. 역사가 무수히 보여 준다. ILO 헌장의 저 선언은 역사적 경험에 대한 반성이다.

그런데 사회정의란 도대체 무엇일까? 수천 년 동안 이어진 논쟁의 주제를 이 자리에서 결론지을 수는 없다. 대신 ILO 헌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개념에 주목하자. ILO 헌장은 이렇게 말한다. “어느 한 나라라도 진정으로 인간적인 노동체제를 도입하지 않는 것은 다른 나라들이 자국에서 노동자들의 지위를 개선하고자 하는 노력에 장애물이 된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진정으로 인간적인 노동체제”라는 구절이다. 이 표현은 헌장의 불어본을 번역한 것이다. 헌장은 원래 불어본과 영어본 두 가지로 작성됐다. 영어본에서는 해당 구절을 “humane conditions of labour”라고 표현하고 있다. 1991년 12월9일 다자조약 1066호로 공포된 ILO 헌장의 한국어 번역본은 영어본을 취해서 “인도적인 근로조건”이라고 번역했다. 그런데 불어본은 같은 구절을 이렇게 표현한다. “régime de travail réellement humain”. 직역하면 “진정으로 인간적인 노동의 체제”라고 할 수 있다. 불어본이 영어본보다 좀 더 적극적이고 넓은 전망을 담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조약 원본이 아니라 한국어 번역본이 재판 규범으로 인용될 것이라는 점에서 조약의 번역 문제는 생각보다 중요하다. 이 문제는 나중에 다시 다룰 것이다.)

“진정으로 인간적인 노동의 체제”는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첫째는 “진정으로 인간적인”이 “체제”를 수식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즉 체제가 진정으로 인간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것은 노동의 이행을 둘러싼 조건들을 인간적인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다. 고용보장·적정임금·노동 3권 보장·사회보장 등이 해당될 것이다. 영어본에서 말하는 “인도적인 근로조건”이 바로 이러한 의미일 것이다.

두 번째는 “진정으로 인간적인”이 “노동”을 수식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즉 노동 자체가 진정으로 인간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도적인 근로조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노동” 그 자체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인간적인 노동이란 무엇일까? 아마도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속성을 표현할 수 있는 노동일 것이다. 그럼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가장 근본적인 특징은 무엇일까? 그것은 언어, 즉 말이 아닐까? 인간은 무엇보다 말하는 존재니까. 그렇다면 진정으로 인간적인 노동은 곧 노동자에게 말을 허용하는 노동이다. 말을 허용한다는 것은 생각을 허용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노동이 동물이나 기계의 노동과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점은, 인간은 자신의 노동에 자신의 생각을 담아낸다는 점이다. 아무리 “인도적인 근로조건”으로 노동한다고 하더라도 노동하는 자의 생각을 표현할 수 없는 노동은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적인 노동이라고 할 수는 없다.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에 대해서, 자신의 노동을 통해서, 자신의 노동을 위해서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체제가 바로 “진정으로 인간적인 노동체제”다.

그런데 인간적인 노동을 이렇게 해석하는 것, 사회정의를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왜 중요한가? 이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1차 세계대전이 노동에 미친 영향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 이야기는 다음에 하자.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jeseongpark@kli.r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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