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정수 직업환경의학전문의(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얼마 전 진료실로 한 노동자가 찾아왔다. 수천 명의 노동자가 일하는 공장 식당에서 조리업무를 하는 분이었다. 몇 달 전 일하다가 허리를 삐끗해 집 근처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는데 좋아지지 않았고, 다리 저림 증상까지 발생해 서울에 있는 유명한 병원에 가서 MRI를 찍었는데 추간판탈출증이 확인됐다고 한다. 시술을 받았고, 어느 정도 좋아지기는 했는데 아직 통증이 다소 남아 있는 상태라고 했다. 일하다가 허리를 다친 노동자들이 보통 겪는 전형적인 사례였다. 일하는 공장과 사는 집에서 그다지 가깝지 않은 우리 병원을 찾은 이유는 아직 남아 있는 통증에 대한 치료와 더불어 산업재해 보상을 신청하기 위해서였다. 2년 전쯤 같은 일을 하던 동료가 거의 같은 증상과 진단명으로 본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 산재 신청을 해서 승인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 얘기를 전해 듣고 우리 병원을 찾은 것이었다.

필자의 임상지식이 비록 짧지만 환자의 증상, MRI상 디스크가 돌출된 방향과 정도, 증상과 영상이 일치하는 점, 시술 이후 증상이 호전된 점 등을 봤을 때 추간판탈출증을 진단하는 데 별 무리가 없어 보였다. 또한 조리업무가 허리를 포함한 신체 여러 부위의 근골격계질환 발생 위험이 상당히 높은 업무인 데다, 매일 수천인분의 음식을 만드는 대공장 식당에서 5년 가까이 조리업무를 하던 노동자에게 발생한 요추 염좌, 요추 추간판탈출증 등 허리 관련 질환의 업무관련성이 매우 높다는 데 이견이 있을 직업환경의학전문의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하물며 같은 일을 하던 동료 노동자가 거의 같은 상황에서 발생한 같은 증상과 진단명으로 산재 인정을 받았으니 업무관련성은 거의 99.9%였다.

더 이상 무슨 판단이 필요할까 싶었으나 절차는 절차인지라 환자에게 산재 신청 및 승인 절차를 설명하고, 본원에서 산재 신청을 하고 업무관련성 소견서까지 첨부했다. 한 달쯤 지났을 무렵 진행 과정이 궁금하던 차에 근로복지공단 직원과 통화를 하게 됐다. 지금까지 사업장에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몇 가지 자료를 취합하느라 시간이 다소 지체됐는데, 조만간 취합한 자료를 모아 근로복지공단 소속병원에 업무관련성 특진을 보낼 예정이라고 했다.

지난해부터 조리·건설 등 5대 업종을 대상으로 근로복지공단 소속병원에서 근골격계질환에 대한 업무관련성 특진 시범사업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재해노동자 당사자가 업무 사진, 영상 등 관련 자료를 취합해 제출하는 관행으로 인해 산재 신청 과정에 번거로움이 있었다. 또한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아닌 공단 직원들이 재해조사를 실시함으로써 전문성 논란, 과도한 업무 부하 등의 문제가 발생했다. 전문성을 갖춘 근로복지공단 소속병원에서 업무관련성 평가가 이뤄짐으로써 이런 문제들이 어느 정도 개선되고, 평가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지면서 재해노동자뿐만 아니라 관련 전문가 사이에서도 시범사업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많았다.

그런데 최근 많은 사례가 한꺼번에 몰리면서 지체 현상이 나타나 업무관련성 평가가 지연되고 있다고 한다. 공단 직원에게 시간이 많이 소요될 듯하니 특진 없이 그냥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 심의를 받도록 하는 것이 가능하냐고 물었더니, 해당 직종은 모두 특진을 보내라는 것이 내부 지침이라서 그렇게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업무관련성 평가의 전문성을 높이고 재해노동자들의 수고를 덜어주자는 취지에서 하는 시범사업이 오히려 발목을 잡고 있는 형국이다.

며칠 전 그분이 현장에 복귀해도 될지 물어 왔다. 개인 병가로 휴직 중이었는데,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았지만 몇 달째 쉬고 있는 상황이라 다시 일을 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산재 승인이 거의 확실해 보였지만 100% 장담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생계 문제까지 내가 해결해 줄 수 있는 건 아니라서, 좀 더 치료를 받으시라고 권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승인이 되면 다시 휴직 상태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으므로 그때까지 무리하지 말고 살살 일하시면서 잘 버티시라고 얘기해 드린 것이 전부였다.

업무관련성 평가 특진 시범사업이 신속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제도적 보완이 시급해 보인다. 관련 전문가들이 예전부터 지적한 것처럼 모든 업무관련성 질환의 승인 여부를 질판위에서 판단할 것이 아니고, 누가 보더라도 업무관련성이 명백한 경우에는 공단 자문의 수준에서 승인할 수 있도록(업무관련성이 명백한 경우는 질판위 심의 없이 승인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질판위 심의를 통해 승인 여부를 판단할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하는 것이 필요하다. 재해 당사자들에게는 산재 승인을 받는 것뿐만 아니라 신속한 판단 또한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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