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퐁니·퐁넛 위령탑에는 74명의 희생자 명단이 새겨져 있다. 당시 78세 노인부터 그해 태어난 갓난아이까지 희생됐다.<연윤정 기자>

한국과 베트남은 희비가 교차하는 ‘운명의 상대’이자 ‘아픈 손가락’이다. 두 나라는 식민지에서 해방된 뒤 분단체제가 들어선 아픈 역사를 공유하고 있다. 한국은 베트남과 1992년 수교했다. 지금은 베트남 투자 1위 국가가 한국이다. 얼마 전에는 박항서 감독이 이끄는 베트남 축구대표팀이 동남아시아축구선수권대회(스즈키컵)에서 우승했다.
하지만 두 나라 사이에는 풀지 못한 구원이 있다. 한국은 베트남전쟁 때 미군 다음으로 많은 전투병력을 파병했다. 한국군이 베트남 민간인을 학살했다는 증언이 잇따르는 배경이다.
인천지역 시민단체인 노동희망발전소(이사장 이성재)가 지난 3~9일 5박7일 일정으로 베트남 중남부기행을 했다. 한국군 학살지를 포함한 기행 여정에 <매일노동뉴스>가 동행했다. 분단과 전쟁의 상흔을 찾는 길에서 사죄와 용서, 화해를 꿈꿔 본다. 상·하편으로 나눠 싣는다.<편집자>


답사단은 지난 5일 오전 세 번째 학살 방문지인 퐁니·퐁넛으로 향했다. 호이안에서 20여분 거리의 가까운 곳이었다. 퐁니·퐁넛과 다음에 찾아갈 하미마을은 올해 4월 국내에서 열린 민간 모의법정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평화법정’에서 증언대에 오른 학살지다.
 

퐁니·퐁넛 학살 생존자인 응우옌 티 탄씨가 답사단과의 간담회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이천호 참가자>

“똑똑히 봤습니다, 한국군을요”

퐁니·퐁넛에 도착하자 생존자인 응우옌 티 탄(58)씨가 답사단을 기다렸다. 응우옌 티 탄씨는 시민평화법정에서 증인으로 나선 주인공이다.

“저는 똑똑히 기억합니다. 한국군이 마을로 들어왔을 때 집안에 파 놓은 땅굴에 숨었어요. 하지만 땅굴(방공호)을 찾아낸 한국군이 나오라고 했죠. 그때 전 똑똑히 한국군을 봤습니다.”

1968년 2월12일 오전 청룡부대가 퐁니·퐁넛 마을 민간인 74명을 학살한 사건이 일어났다. 마을은 미군 전략에 따라 베트콩이 없는 안전마을(전략촌)로 분류된 곳이었다. 미군 해병대 소대와 자매결연을 맺었고, 남베트남군 가족들도 살고 있었다.

그런 곳인데도 한국군이 들어와 민간인을 학살한 것이다. 남베트남 정부가 강하게 항의했고, 미군은 독자적인 조사를 통해 문제를 제기했다. 2000년 기밀 해제된 당시 미군 조사보고서에 끔찍하고 잔혹한 학살 증거사진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응우옌 티 탄씨는 당시 8세였다.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어머니와 그를 포함한 형제 4명이 살고 있었다. 학살 당일 어머니는 일하러 시내로 나갔다. 이모가 어린 아들을 데리고 집으로 왔다. 오전 8시께 한국군이 마을로 들어왔다. 이모는 집 안 땅굴로 들어가라고 외쳤다. 총소리가 이어졌다. 30분이 지났을까. 마침내 한국군이 집에 들이닥쳤다.
 

하미마을 위령비를 관리하는 응우옌 타잉 디에우씨가 철문을 열고 있다. 그의 어머니 쯔엉 티 투씨는 하미마을 학살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다.<연윤정 기자>

퐁니·퐁넛 학살 사건, 미군이 조사

“한국군이 땅굴 입구에서 나오라고 했어요. 이모가 겁이 나서 올라가지 않으니까 수류탄을 던지겠다고 협박했어요. 오빠부터 올라갔는데 총에 맞았습니다. 뒤이어 올라간 언니와 동생에 이어 저도 총에 맞았습니다. 아이 업은 이모는 칼에 찔려 죽었지요.”

한국군은 급기야 집까지 불태웠다. 땅굴 안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오빠와 응우옌 티 탄씨뿐이었다. 오빠는 배·엉덩이에, 자신은 배에 총을 맞았다. 둘은 불태워지지 않은 이웃집으로 기어갔다. 그 집 땅굴에는 10여명이 살아 있었다. 둘은 곧바로 정신을 잃었다.

응우옌 티 탄씨는 눈물을 쏟았다. 그는 “나중에 어머니도 그날 돌아가신 걸 알았다”며 “한국군 학살 소식을 들은 어머니가 마을로 돌아왔다가 논밭에서 붙잡혀 총에 맞아 돌아가셨다고 외할머니가 한참 뒤에 말씀해 주셨다”고 말했다.

부모와 형제를 잃은 두 남매의 삶은 비참했다. 오빠의 부상이 더 심해 남매는 각기 다른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헤어졌다.

1975년 전쟁이 끝난 후 다낭의 한 시장에서 우연히 오빠를 만났다. 오빠는 총상으로 방광이 터져 오줌주머니를 차고 있었다.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는 “남매가 만났지만 저 역시 식모살이를 하는 처지여서 같이 살 수 없었다”고 안타까워했다.
 

한국군 학살 사실을 기록한 비문을 그대로 둔 채 연꽃 그림이 그려진 대리석으로 덮었다.<연윤정 기자>

“한국이 학살 시인하고 사과했으면”

응우옌 티 탄씨는 눈물을 거두고 답사단과 함께 학살 현장으로 향했다. 그의 집에서 버스를 타고 학살 현장으로 갔다. 잠시 뒤 버스에서 내려 논밭 사잇길로 걸어가니 위령탑이 나왔다. 위령탑에는 74명의 희생자 명단이 적혀 있다. 78세 노인부터 그해 태어난 갓난아이까지 희생자 명단에 올랐다.

답사단은 위령탑에서 참배했다. 근처 오솔길 안에 놓인 작은 제단에서도 같은 의식을 치렀다. 제단에서는 그가 살았던 마을이 보였다. 답사단은 마을 길가 사당에서도 참배했다. 학살을 경험한 동네 사람들이 세운 사당이다.

응우옌 티 탄씨는 국내에서 열린 시민평화법정에서 “한국 정부와 참전군인들이 학살을 시인하고 사과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이성재 노동희망발전소 이사장은 “우리의 방문으로 아픈 기억을 끄집어내게 돼 죄송하다”며 “한국에 돌아가서 베트남전쟁 가해의 역사를 알리는 데 함께하겠다”고 약속했다.

응우옌 티 탄씨와 헤어진 답사단은 같은날 오후 하미마을에 도착했다. 68년 2월22일 오전 2시간 동안 하미마을 민간인 135명이 청룡부대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한국군은 마을 사람들을 불러 모은 뒤 총과 수류탄, 유탄발사기로 학살을 자행했다.

학살이 끝난 뒤 생존자들은 서둘러 희생자 무덤을 만들었다. 그러자 한국군은 불도저를 가지고 무덤을 파헤치고 시신들을 밀어 버렸다. 학살 흔적을 없애려 한 것이다.
 

지난 6일 베트남 축구팀이 스즈키컵 4강에서 승리한 뒤 호찌민시 시민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도로로 쏟아져 나와 축하하고 있다.<안순배 참가자>

한국과 베트남의 간극, 하미마을 위령비

답사단이 찾은 하미마을 위령비 입구 철문은 닫혀 있었다. 주변은 도로공사 중이었다. 공사차량만 가끔 오갔다.

하미마을 학살 위령비는 많은 사연을 안고 있다. 베트남전쟁 참전군인단체 중 하나인 월남참전전우복지회가 기부한 돈으로 2000년 12월 착공했다. 그런데 완공을 앞둔 이듬해 월남참전전우복지회가 비문 내용을 문제 삼았다. 비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68년 이른 봄 청룡부대 병사들이 미친 듯이 양민을 학살했다. (중략) 피가 이 지역을 물들이고 모래와 뼈가 뒤엉켜 섞였다. (중략) 한국인들이 다시 이곳에 찾아와 과거의 한스러운 일을 인정하고 사죄한다. 용서의 바탕 위에 이 비석을 세웠다.”

월남참전전우복지회는 비문을 지울 것을 요구했지만 마을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비문은 수정되지 않았지만 연꽃 그림이 그려진 대리석으로 비문을 덮기로 했다. 진정한 사죄와 용서 없이는 화해가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목도한 순간이다.

위령비를 관리하는 응우옌 타잉 디에우(38)씨가 도착했다. 답사단이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고 급하게 달려왔다. 그의 어머니 쯔엉 티 투(79)씨는 하미마을 학살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다. 학살 당일 아이 2명을 포함해 가족 12명을 잃었다. 그 역시 다리에 총상을 입었다.
 

호찌민시 통일궁에서 바라본 전경. 1975년 4월30일 남베트남 대통령은 통일궁에서 정문을 박살내고 들어오는 북베트남군 탱크를 맞았다.<연윤정 기자>

제주4·3과 노근리, 그리고 한국군 학살

응우옌 타잉 디에우씨가 위령비 입구 철문을 열어 줬다. 마당으로 들어서니 한가운데 위령비가 있고 양쪽에 희생자 무덤이 조성돼 있다. 위령비에는 135명의 명단이 새겨져 있다. 88세 노인부터 그해 태어난 갓난아이까지 희생됐다.

답사단은 위령비에 참배했다. 위령비 뒤쪽으로 돌아가 보니 연꽃 그림 대리석이 보였다. 비문을 가린 연꽃 그림 대리석을 언제쯤 치울 수 있을까. 가슴 한편이 먹먹했다.

위령비 주변은 집 한 채 없이 황량했다. 응우옌 타잉 디에우씨는 “본래 마을이 있었는데 죽은 사람이 많아 다른 데로 이사 갔다”고 설명했다. 위령비 근처에는 그의 집만 있다.

베트남 학살지를 돌아보며 제주4·3과 노근리 학살을 떠올렸다. 한국과 베트남 모두 학살을 경험했다. 피해자들의 고통은 같다. 시간이 흐르면 반드시 세상에 드러난다는 사실도 같다.

답사단은 하미마을을 끝으로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미군 학살지 답사를 마쳤다. 다낭으로 발길을 돌렸다. 다낭에는 한국군 주둔지가 있었다. 황석영의 소설 <무기의 그늘> 배경을 이룬 곳이다.

마침내 분단체제 종지부 찍은 베트남

답사단은 6일 호찌민으로 이동했다. 스즈키컵 4강전이 열렸다. 답사단이 호찌민에 도착하자 베트남과 말레이시아가 막 경기를 시작했다. 답사단은 식당에서 베트남 사람들과 함께 박항서 감독이 이끄는 베트남 축구대표팀을 응원했다. 박수를 보내며 결승 진출을 축하했다.

경기가 끝난 뒤 도로마다 쏟아져 나온 붉은색 오토바이 물결이 장관을 이뤘다. 2002년 한일월드컵 때와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열정과 에너지로 가득 찬 베트남 젊은이들의 오토바이 물결은 다음날 새벽까지 이어졌다.

답사단은 7일 베트남전쟁 당시 베트남민족해방전선(베트콩)이 미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펼친 구찌터널을 찾았다. 8일에는 전쟁박물관과 남부여성박물관, 통일궁을 차례로 방문했다. 전쟁박물관은 미라이박물관에서 본 것보다 끔찍하고 참혹한 전쟁의 흔적이 전시돼 있었다. 특히 고엽제로 고통받는 당사자와 2~3세의 사진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남부여성박물관은 남부지역 여성 투사들의 투쟁과 성과를 담아내고 있다. 한국에는 여성박물관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일제강점기 조국 해방을 위해 투쟁하고 희생한 여성 투사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통일궁에서는 75년 4월30일 북베트남군 탱크가 남베트남 대통령궁이었던 통일궁 정문을 박살 내고 들어오는 사진을 떠올렸다. 베트남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미국을 이긴 나라로 기록돼 있다. 외세에 의해 강제된 분단체제에 마침표를 찍었다.

일본군 위안부·강제징용 전철 밟지 않아야

한국과 베트남은 베트남전쟁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한국은 가해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고, 베트남은 “한국은 미국의 용병일 뿐”이라는 태도를 취한다.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은 32만명의 전투병력을 파병했다. 미군 다음으로 많은 숫자다. 이 전쟁에서 한국군 5천명이 사망했고, 1만1천명이 부상당했다. 또 16만명의 고엽제 피해자를 낳았다.

베트남 정부는 전쟁 종료 직후 전쟁범죄조사위원회를 설치했다. 80년대 초 ‘남베트남에서 남한 군대의 죄악’이라는 문건을 발간했다. 문건에 따르면 베트남 민간인 5천명이 한국군에게 피해를 입었다. 구수정 한베평화재단 이사가 2000년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은 80여건, 희생자가 9천명이나 된다.

베트남 정부가 공식적으로 책임을 묻지 않는다고, 미라이 학살 같은 증거를 남기지 않았다고, 역사적 사실이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피해자의 피눈물 나는 증언이 잇따르고 있고, 베트남 학자들은 지금도 학살지를 발굴하고 있다.

국내 시민평화법정 재판부는 퐁니·퐁넛 학살 생존자 응우옌 티 탄씨와 하미마을 학살 생존자 응우옌 티 탄(동명이인)씨의 한국 정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청구를 받아들여 국가배상법에 따른 배상을 인정하고 진상조사를 권고했다.

역사적 진실은 반드시 수면 위로 떠오른다. 일본군 위안부·강제징용 노동자 문제는 한국 정부가 아닌 피해 당사자와 시민사회가 용기 있게 제기하면서 세상에 드러났다. 베트남에서의 한국군 학살 역시 비슷한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높다. 우리가 비극의 역사를 인정하고 정면으로 마주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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