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윤희 직업환경의학전문의(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작은 건설폐기물 수거업체를 방문해서 노동자 상담을 했다. 스물여섯 젊은 남자의 혈압이 190/110으로 나왔다. 병원 입원 상태라면 당장 정맥에 혈압강하제를 투여해야 할 정도로 높은 수치다. 깜짝 놀라 더 자세히 상황을 물었다. 그는 혈압약을 먹은 지 두 달째였으나 하루 한 알 투약으로 조절이 안 되고 있었고 2조2교대제, 흔히들 말하는 ‘죽음의 맞교대’를 하고 있었다. 생활 습관도 엉망이었다. 혈압약을 먹고 있음에도 매일 소주 두 병에 담배 한 갑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런 증상도 없었고 건강해 보였다. 일하는 데 몸에 무리가 된다고 하지도 않았다. 그는 업무적합성 평가 대상인가? 맞다. 대상이다. ‘고혈압성 긴박’이라는 개념이 있다. 신체의 특이증상이나 병의 징후는 보이지 않지만 너무나 혈압이 높아(180/120 이상) 주의를 요하는 상태를 말한다. 이 젊은 노동자는 의학적으로 이 범주에 속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말을 사업장에 꺼내지도 않았다. 왜냐면 영세 사업장에서의 업무적합성 평가는 너무나 쉽게 해고, 혹은 자진 퇴사의 전 단계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업무적합성 평가를 하면서 고려해야 되는 사항들은 너무나 많다. 현실적으로 우선 회사의 태도를 살펴야 한다. 얼마나 이 노동자를 아끼는지, 작업 전환이나 재활 프로그램을 통해서라도 아픈 노동자를 복귀시키려는 적극적인 의지가 있는지 말이다. 그 말인즉슨, 회사가 어느 정도 규모는 돼야 그나마 업무적합성 평가라는 절차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위 폐기물 처리업체처럼 2조2교대제 외에는 작업 전환시킬 부서도 없는 영세 사업장에서는 업무적합성 평가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보면 된다. 최근 한 대기업에서 회사 내부적으로 활용할 용도로 자체 업무 적합성 평가지침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목적을 ‘질병과 상해를 극복하고 일하고자 하는 사람이 일할 수 없는 이유를 제거하고 성공적으로 업무에 복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으로 뒀다. 비록 한 대기업의 일부 사례에 불과하지만 그런 전례가 만들어진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매우 반가운 소식이다.

또 다른 현실적 고려 사항은 낙인효과다. 지난 번 글의 사례에서 봤듯이 업무적합성 평가 결과 노동자는 자진 퇴사를 하고 말았다. 물론 평가와 자진 퇴사가 직접적 인과관계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둘 사이엔 수많은 작용 요인들이 있었고, 의사인 나는 그 모든 요인들을 예측하거나 통제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 요인들 중 하나가 낙인효과였음을 배제할 수 없다. 의사나 회사, 혹은 노조의 강력한 의지로 해당 노동자를 제대로 업무에 복귀시키기 위해 상담과 평가를 하는 과정에서 노동자는 어쩔 수 없이 “아픈 사람, 아픈데도 일해야 해서 다른 동료들이 희생하고 배려해 줘야 하는 사람”으로 낙인찍히고 만다. 은근히 따돌려질 수도 있다. 혹은 노동자 스스로 자신을 민폐라 여기고 위축될 수도 있다. 이런 수많은 인간의 심리는 적정 사회·제도적 장치와 환경이 구비됐을 때에야 완화될 수 있을 것이다. 노르웨이처럼 아파도 1년간은 국가에서 먹고사는 데 충분한 연금을 주고 기본 복지제도와 사회안전망으로 생계가 쉽게 위협받지 않은 곳이라면 인간의 심리가 각박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슬프게도 대한민국은 노동력이 생계를 좌지우지하는 나라다. 이런 나라에서 낙인효과를 줄이려면 교육이 필요하다. 아픈 사람도 일을 해야만 하고, 당연히 일할 권리를 보장받아야 한다는 것, 나도 언제든 저 위치에 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라인의 생산성보다 노동자 건강이 우선이라는 것. 이런 기본적인 가치관들이 현장에 보편화돼야 할 것이다.

낙인효과, 회사의 태도, 두 가지를 고려했을 때 위 스물여섯 노동자는 여러모로 불리했다. 2조2교대제라는 교대근무에 적합하진 않았지만 그런 언급은 아예 하지 않았다. 그에게 진료의뢰서를 작성해 주며 건강관리를 하라고 심각하게 충고했다. 담당자에게는 약물 변경으로 좋아질 수 있을 것이며 오늘 많이 혼냈으니 태도가 바뀔 것이라고 말해 줬다. 업적의 기본 전제는 일할 수 있는 사람을 일하게 하는 것이다. 영국과 미국의 대표적인 <업무적합성 평가> 교과서 서문은 모두 위 전제를 기본으로 한다. 조금 아프더라도 되도록 일을 하게 하는 것, 그 과정에서 회사와 동료들의 조율을 최대한 이끌어 내는 것. 이것이 산업보건의사와 전문가의 역할이다. 그리고 두말할 필요도 없이 전문가의 이 역할이 제대로 힘을 발휘하려면 아픈 이를 바라보는 사회의 지배적 가치관과 철학 또한 전향적으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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